공부 또는 독서를 할 때, 이성보다는 감성을 강조하고 싶다.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일을 할 때 느끼는 재미는 오직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모든 활동의 궁극적인 결론은 나를 발견하는 일,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장자>>에 나오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수레바퀴를 너무 느슨하게 깎으면 수레바퀴가 헐거워서 문제가 된다. 그런데 너무 빡빡하게 깎으면 그게 뻑뻑해서 문제이다. 제대로 깍는 일은 손으로 익혀서 마음에 담아 놓은 것이다. 이것은 자식에게도 잘 전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험헤서 얻은 이것은 마음에 담겨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이 말은 언어를 통한 소통과 전달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독서나 공부 같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와인이나 커피같은 세계를 들어가는 일을 이론 강의나 책으로 익힐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분야의 공부에서는 저자가 초대한 세계로 다녀온 뒤에는 내 길을 찾는 것이다. 나를 찾는 일이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자기 마음이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책을 읽으면서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은 후에는 바로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사실은 읽기와 쓰기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쓰는 것은 표면에 뭔가를 새긴다는 것이지만, 말하고 쓰는 행위는, 읽고 듣는 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진 자아가 동력을 받아서 또는 충격을 받아서 확장되는 일이다. 그래서 읽기는 결국 쓰기로 완성된다. 듣기는 또한 말하기로 완성된다. 이 말은 듣기와 읽기 속에 담긴 내용이 나에게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개념 세계를 구축한다. 개념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권위를 갖기가 쉽다. 게다가 개념은 그 권위를 타고 무한 상승하여 윗자리를 자치한다. 이 상승을 부추키는 힘을 우리는 원심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지식은 항상 무한 분화한다.
'나'의 고유성은 나의 몸에 있고, 나의 마음에 있다. 개념이나 지식은 외부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원심력같은 것이다. 반면 나의 몸과 마음은 중력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욕망도 원심력이라면, 그 욕망의 절제는 구심력이다. 이렇게 분리되는 현상을 좁이는 일이 나를 고독하게 만날 때 이루어진다.
이 분리 현상이 커진다는 것은 내 몸과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과 나의 머리가 생각하는 일이 하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중력이 빠지면, 헛도는 '내'가 없는 행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편은 손으로 다룬 일이 마음에 있다고 했고, 장횡거는 책을 읽음으로써 내 마음을 지킨다고 한 것이다. 내 마음이 지켜지지 않는 독서와 내 몸이 지켜지지 않는 읽기,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작동하지 않는 지식은 항상 나를 배반한다. 자발성이 중요하다는 말과 같다. 나의 재미를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하는 일을 진정으로 즐길 수 없다.
즐거움이란 내 마음이 공감을 경험한 후에 밑바닥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의 공간 안에서 일으키는 진동이다. 읽기를 통해서 지행해야 할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 즐거움을 거쳐서 자기가 재발견되고, 재발견된 자기가 쓰기로 확장된다. 자기가 운동, 즉 움직임을 회복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자기 스스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자기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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