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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심재'의 적합한 번역은 '마음을 굶기다'이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20일)

2021년도 정말 얼마 남지 않은 12월 셋째 주 월요일이 시작되는 아침이다. 오늘 아침 화두는 요즈음 읽고 있는 <<장자>>의 좌망(坐忘)이다. 오늘 아침 사진은 공주 지유씨 집에서 마신 생차로 20년이 넘은 고산차이다. 이 색에 나는 반했고, 차가 몸에 들어가니 말 그대로 생명력이 솟았다.

'좌망'을 <<장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손발이나 몸을 잊어버리고, 귀와 눈의 작용을 쉬게 한다. 몸을 떠나고 앎을 몰아내는 것, 그리하여 '큰 트임(대통, 大通)과 하나됨"이다. 도(道) 깊이 이르는 길은 우선 인의(仁義), 예악(禮樂) 같은 주지주의나 윤리지상주의 의식 구조를 버려야 한다. <<장자>>에서 말한 기심(기심, 機心, 기계적인 마음), 관념적이고 계산적이고 논리적이고 분석적이고  합리적인 마음을 우선 잊어야 한다는 거다. 모든 인위적이고 차별적인 지식을 잊어버리는 상태이다. "대통(大通)의 세계와 같아지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게 되며, 큰 도(道)의 변화와 함께하면 집착이 없게" 된다.

대통(大通)의 세계에 접속하고 싶다. 다 되는 대로 내버려 둔다. 대신 열심히 활동하고, 접속하여 관계를 만들고 장 유지하며, 차이를 생성하는 일상을 명랑하고 즐겁게 한다. 오늘 아침은 일찍 병원에 다녀와야 한다. 그냥 물 흐르는 대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냥 좌망하여 대통의 세계에 진입한다.

좌망에서 중요한 것은 생래적인 무지 뿐이라면 잊고 버리고 할 것도 없다는 점을 잊지 않는 거다. 따라서 잊어버린다는 것은 잊어 버리 전에 먼저 획득함이 있고, 그 후 이런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어서 이것을 초월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우선 의사의 말을 경청하고, 판단할 생각이다. 이렇게 합리적 사고를 초월한 단계는 합리적 사고에도 미치기 이전의 단계와 분명히 다르다. 외부적인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소위 망외(忘外), 망물(忘物)이라 할 수 있다면, 내부적인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잊는 것을 망내(忘內), 망기(忘己)라 할 수 있는데 이 둘째 잊음까지 가야 좌망(坐忘)이라는 거다.

좌망에서 우선 지체(肢體) 같은 외형적인 것을 잊어버린다고 했다. 감각 작용의 중단이다. 그리고 나서 총명(聰明) 같은 이지(理智) 작용을 버리게 된다고 했다. 둘 다 이분법적 의식 작용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새로운 의식,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구애되지 않는 '비 이분법적' 혹은 '초 이분법적' 의식, '우주 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 반 대가 좌치(坐馳)이다. <<장자>> "인간세"에 이 말이 나온다. 몸은 가만히 앉아 있으나 마음이 함께 앉아 있지 못하고 사방을 쏘다니게 되면 헛일이다. 이렇게 몸은 앉아 있으나 마음이 쏘다니는 상태를 "좌치"라 하고, 가만히 앉아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것은 "좌망(坐忘)"이라 한다. 서로 맞서는 개념이다. 좌망이 마음의 구심(求心)운동이라면, 좌치는 마음의 원심(遠心) 운동인 셈이다. 무위는 좌망에서 나온다.

우리의 뇌(특히 좌뇌)는 항상 재잘거린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뭔가를 떠들어 댄다. 그러면서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래 우리는 이 산만함에 맞서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렴과 집중이다. 요즈음 자신의 힘을 절제하지 못해, 원심력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그런 사람은 중독을 유발하여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는 쾌락, 자극, 새로운 것을 항상 하이에나처럼 찾아다닌다. 쉽게 웃음과 울음을 자아내는 촌극을 감동이라 평가하고, 세네카의 구심력 찬양문구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건배사로 착각하고, 니체의 고통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라는 혜안인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노래방 춤 쯤으로 여긴다. 원심력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은 힘이 없고 불안하고 산만하다." 배철현의 <매일묵상>에서 읽은 것이다. 반면, 원심력을 구심력으로 제어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힘이 있다.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원심력의 과시를 희생하여야 한다. 나는 이 구심력과 원심력의 조화를 위해, 아침 마다 <사진 하나, 시 하나>를 쓴다. 자꾸 밖으로만 출렁이는 생각과 본능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무기력하지만, 그것들을 제어하고 조절하여, 그 힘을 비축하는 사람은 강력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좌망의 세계에 진압하려면,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다. 하나는 "오상아(吾喪我, <<장자>>의 제2편 "제물론")이고 또 하나는 심재(心齋, <<장자>>의 제4편 "인간세")이다. "오상아"는 유기체의 감각에 매몰되어 만들어진 편협한 ‘나’를 죽이고, 항상 변하는 세상을 받아들여 기억하고 느끼며 세상과 하나되는 ‘나’를 살려내는 것이다. 1년에 한번이, 한달에 1번으로, 한달에 한번이 매일 1번으로, 매일 한번이 시시각각으로 편협한 ‘나’를 죽이고 세상과 하나인 ‘나’를 살려낼 수 있을 때, 물질을 지배하며, 자연을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깨달으며 진정한 부활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나의 마음(心)을 빼내면(咸),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 살아있는 마음인 감성(感性)이 생겨, 자존심(心)으로 똘똘 뭉친 '我(아)'가 죽고 자존감(感)이 충만한 '吾(오)'로 부활한다 싶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다르다. '자존심'은 '나는 잘났다'면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고,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하면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심재(心齋, 마음 굶김)"는 <<장자>> 제4편 "인간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안회는 자기가 인의(仁義)를 갖추었기에, 요즈음 말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에, 겉으로 나마 굽실거려야 할 때는  굽힐 줄 아는 타협심과 유연성도 있고, 필요할 때엔 옛말이나 고사(古事)를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인용해 쓸 수 있을 만큼 고전에 박식하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나니 더 이상 뭐가 모자라는지 자기는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런 도덕성, 참신성, 진취성, 두뇌, 학연, 건강, 젊음 등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도 아직 모자라다니, 제발 무엇이 모자라는지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에 공자는 한마디로 '재(齋)하라'고 한다. '재'란 말은 '굶다'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비우는 것이 아니라, 취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목욕재계(沐浴齋戒)'라 할 때처럼 의식으로 하는 재는 물론 술이나 고기, 파, 마늘 등 자극성 음식을 피하는 것이다. 안회는 그런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자기는 본래 가난해서 굶기를 밥 먹듯 하나 굶는 것이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라면 자기보다 나은 적격자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공자가 말하는 '재계'란 그런 육체적인, 혹은 의식(儀式)적인 재계가 아니라 바로 '마음의 재(心齋)'라고 못박았다. 여기서 '재(齋)'란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재계(齋戒)'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래서 '심재'의 적합한 번역은 '마음을 굶기다'이다. 그냥 비우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이다. 이는 제2편에서 말한 '오상아(吾喪我)' 그리고 제6편에 나오는 '좌망(坐忘, 앉아서 잊어버림)'과 함께 <장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다 같이 우리의 욕심, 분별 심, 이분법적 의식(意識), 일상적 의식, 자기 중심 의식인 보통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이를 초월하는 초 이분법적 의식, 빈 마음, 새로운 마음을 갖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될 진정으로 '위대하고 으뜸 되는 스승'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장자>> 제6편 "대종사"는 진인(眞人)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진인이 되려면, 다른 말로 참된 인간, 즉 참 나(진아)를 찾으려면,  우리의 일상적인 굳은 마음(成心)을 스승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말끔히 비우는 '마음 굶기기(心齋)'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진인'도 도를 대표하는 사람이므로 궁극적으로 도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위대하고 으뜸 되는 스승' 혹은 스승 중의 스승이라는 것이다. <<도덕경>> 제25장에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습니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법을 '본받다'로 해석한다. 그래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로 해석한다.  노자는, 공자처럼, 어떤 정해진 법칙들, 즉 인의예지신과 같은 가치를 유형의 가치로 결정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무위(無爲)를 덕으로 여기는 노자가 생각하는 '법'의 의미는 다르다고 본다.

법(法) 자를 파지하면, 물(水)이 자연스런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만물을 이롭게 한다. 물은, 상선약수(上善若水, 지극하 착한 것은 물과 같다)라는 말처럼,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지도 타인과 다투지도 않는다. 또한 물은 겸허(謙虛)가 몸에 배어 있어 언제나 낮은 곳으로 스스로 저절로 아무 소리도내지 않고 흘러 들어간다. 그러니까 법은 물과 같은 몸가짐이며 활동이다.

그런 측면에서 위의 문장을 다시 번역하면, "인간은 발을 땅에 디디고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잘 어울려 살 뿐만 아니라. 지구의 동거존재인 다른 동물들과 식물들과 잘 어울려 산다. 땅에 있는 동물과 식물들은, 하늘이 가져오는 물, 공기, 햇빛을 흠뻑 받으면서, 주어진 짧은 수명을 살면서, 하늘에 한 점 부끄런 없이 산다. 저 하늘에 있는 해, 달 그리고 모든 행성들은 지난 수 억년 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하염없이 갈 것이다. 그 길을 이탈하면 우주가 혼돈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주가 운영하는 법칙인 도는 자연스럽다. 물과 같이 고요하게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저 낮은 곳으로 조용하게 흘러간다." 정리가 되는 아침이다. 시 하나를 공유하고 긴 글을 마친다. 오늘 아침 시처럼, 그냥 "흙"이 되자.

흙/문정희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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