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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19일)
지난 목요일에 이어, 오늘 아침도 리더 이야기를 해 본다. 리더는 오해 받는 사람이다. 부지런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속적인 행복을 위해, 남들 보다 먼저 일어나 최선의 전략을 모색해야하기 때문이다. 리더는 공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반감과 오해의 대상인 경우가 많다. 그가 펼치는 전략은 일부 이해집단을 위해 좋은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선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이 아니라 항구적인 대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리더들을 배척하고 제거해왔다. 리더들의 공통점은 동시대인들에게 미움과 질시의 대상이 되어 자신들은 정작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렸다.
배철현 교수의 <묵상>을 보면, 랄프 왈도 에머슨도 <<자립>>이란 에세이 ‘14단락’에서 위대한 리더들이 대중으로부터 받는 평가는 환호가 아니라 오해라고 말한다. “오! 당신이 분명 오해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예수,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그리고 뉴턴은 오해의 대상이 되었다. 육체를 지니고 태어난 모든 청결하고 지혜로운 영혼은 그렇습니다. 위대하다는 것은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리더는 남들보다 많이 주저하고 오해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위대하다. 리더는 스스로에게 감동적이어서 완벽한 삶인 ‘위대 함’을 매일 수련한다. 그 수련이 그에게 진실(眞實)함과 선(善)을 선물로 준다. 리더는 이 세 가지 덕목을 몸에 훈습(薰習)하여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진실 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가치를 지키고 발휘하려는 겸손한 마음가짐이다. 그는 남의 일에 참견하여 들이대지 않는다. 자신에게 온전하게 몰입되어 항상 침묵을 수련하고 누구의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실한 사람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그는 마치 거대한 산과 같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 심겨진 나무와 흐르는 시냇물을 보고 감탄하지만 정작, 그 산 전체를 볼 수 없다. 위대한 리더는 시간과 장소가 거리를 마련할 때, 비로소 그 윤곽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인기나 자화자찬 하는 사람을 쫓는다. 그들에게 서양문학의 효시인 호메로스 시인은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걸인장님이며, 예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떠돌이 목수 아들일 뿐이다. 호메로스는 문학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실의에 찬 동료들의 눈을 보고, 자신의 몸과 목소리, 그리고 눈으로 영웅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노래하면서 웃고 눈물을 흘린 자다. 예수는 모든 인간에겐 신적인 DNA가 있고, 그 유전자를 자극하고 완성하는 가치는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복음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게 외쳤다. 이들의 천재성은 시공간을 넘어 인류모두에게 전파될 진실이 되었다.
리더는 선(善)할 수밖에 없다. 선한 행동과 말을 선한 생각에서 나온다. 기원전 6세기에 등장했다고 추정되는 이란의 예언자 ‘짜라수트라(Zarathustra)'는 이란의 전통적인 사상을 집대성하여 ‘마즈다이즘(Mazdaism, 조로아스터교)이란 종교를 창시하였다. 마즈다이즘의 핵심교리는 이것이다. ‘좋은 생각(정사, 正思)’, ‘좋은 말(정언, 正言)’, 그리고 ‘좋은 행동(정행, 正行)’이다. 영화 <보헤미안 렙소디>의 첫 장면에서,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가 가수가 되려는 프레디 머큐리에게 한 말이다. ‘선’은 의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 선은 그 사람이 오랫동안 자신의 생각, 말, 행동을 갈고 닦아 단순한 삶을 추구할 때, 그에 몸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향기香氣다. 그 자신이 선을 항상 추구하기 때문에 선하게 된다.
우리가 자본의 공세에 맞서고, 상품의 유혹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면, 일상을 구성하는 힘이 필요하다. 이 일상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자산, 즉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지식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지성에서 영성으로 전환하려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하는 거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 "욕망의 재배치"를 요구하고 있는 거다. 다시 말하면, 욕망의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 어떻게?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야 한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나 명품가방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 진다. 더 좋은 자동차와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쾌락적응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 관계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쾌락적응을 통해, 만족이 불가능한 쳇바퀴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인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불행하다. 우리는 한 가지 욕망을 실현시켰을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욕망은 진부한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낙타에게 물었다. "오르막이 좋으냐, 내리막이 좋으냐?" 낙타가 대답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짐이다." 저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에게 짐이 없다면 얼마나 발걸음이 가벼울까? 인생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느냐가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가 중요할 때가 많다. 마음의 짐이 무거우면 인생 길이 힘들다. 살아가는 일이 자꾸 짐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욕망을 가볍게 하는게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 개개인에겐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무게가 있다. 지나친 욕심으로 감당할 수 있는 무게를 오버해서도 안되고 감당해야 하는 무게를 비겁한 방법으로 줄여가도 안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순탄하게 돌아가는 것은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행복 철학은 독특하다. 노예 출신이었던 그는 자유의 개념에서 행복을 도출한다. 노예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행동해야 하므로 신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엄격한 제약을 받는다. 신체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속박이 존재한다. 비록 신체적으로는 자유로울지라도 그의 마음이 무엇에 속박되어 있다면 그를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자기가 이룰 수 없는 욕망과 정념 등에 예속되어 있는 사람도 그것의 노예라는 게 에픽테토스의 주장이다.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주인으로서 자유를 누릴 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세상의 존재들을 나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생각, 판단, 욕망, 분노, 혐오처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이다. 후자는 신체, 죽음, 재산, 운, 인기, 평판, 사회적 지위처럼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고통이나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여기면서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은 어떤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생각이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음이 두렵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나를 화나게 하는 원인은 무례하거나 공격적인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화나게 하고 있다는 나의 생각이다.”
내 것인 것만 내 것이고, 내 것 아닌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누구도 나의 행복을 방해하지 못한다. 나에게 달려 있는 것만 추구해야 한다. 심지어 운도 내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매달려선 안 된다. 병이나 죽음, 운처럼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추구하면 불행한 감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범인(凡人)인 우리들이 스토아 철학자처럼 살 순 없겠지만 지혜는 빌릴 수 있을 것이다. 부부나 자녀 간의 관계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니 자연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뜻대로 하려 들지 말고, 나에게 달려 있는 생각이나 분노 등이 내 바깥에서 날뛰지 않게 단단히 고삐를 죄어야 한다. 그것이 대자유인의 삶이며, 행복의 비결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인에게 행복은 우리의 생활 속 어디에나 숨겨져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뿐이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모른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삶을 뜨겁게 감싸 안고, 자시노가 이웃을 사랑하는 어진 마음을 갖고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용한 주일 아침에 이 좋은 시를 함께 읽는다.
행복/허영자
눈이랑 손이랑
깨끗이 씻고
자알 찾아보면 있을거야.
깜짝 놀랄 만큼
신바람 나는 일이
어딘가 어딘가에 꼭 있을거야
아이들이
보물찾기 놀일 할 때
보물을 감춰두는
바위 틈새 같은 데에
나뭇구멍 같은 데에
행복은 아기자기
숨겨져 있을거야.
고전평론가 고미숙은 이렇게 말한다. "집단이건 개인이건 '욕망이 지성'으로, '지성이 다시 지혜'로 이어지는 비전을 탐구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이젠 "멈추고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과 내면으로, 생명과 자연으로 향하는 통로를 다시 열어가는 것. 그때 비로소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전 세계와 연결되는 길도 열릴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근대 이후 숙명처럼 떠안았던 '고독과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길도 열릴 것이다."
그리고 고미숙은 강의 속에서 이를 위해 우리의 일상에 필요한 세 가지 키워드를 제안하였다. 하나가 '활동을 한다'이다. 태양이 뜨면, 낮에 활동을 하는 거다. 몸을 움직이는 거다. 그 활동하는 곳이 직장일 수도 있고 자기 스스로 활동을 만들어내 어도 된다. 두 번째는 '누군가 또 무언가와 관계를 맺는 거다.' 다시 말하면 접속이 이루어지는 일이다. 삶은 활동과 접속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새로운 것이 생성되게 하는 거다. 특히 차이가 생성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이때 발생하는 진정한 차이는 어떤 것을 배우면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 차이를 느낄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건 사람들이 자주 신상품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상품은 욕망의 확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욕망의 동일성'일 수 있다.
우리는, 알면서도, 일상에서 활동이 아니라, 노동을 하고, 접속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화폐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관계가 단절된다는 말이다. 다른 것들과 접속할 시간이 없다. 그러니까 생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감각의 차이만 만들어 낸다. 차이의 생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삶의 큰 즐거움이 된다. 반대로 감각만이 늘어나는 게 중독이다. 이를 피하고, 하루가 재미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생활의 규칙을 만들어 보는 거다. 고미숙의 주장이지만,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1) 목적론이 해체되어야 한다. 일상이 리듬을 타야 한다. 리듬을 잃는 이유는 목적에 도달한 다음에 살겠다는 목적론이 문제이다. 매일의 일상은 리듬을 타야 한다. 일상이 그 목적에 종속이 되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의 무상함 앞에서 그냥 주저 앉게 된다. 매일 매일을 하는 과정으로 여겨야 한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자유, 행복을 오늘의 조건 안에서 어떻게든 구현해 내는 거다. 아프면 아픈 대로, 아픈 상태에서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태에서 지유와 행복을 위한 액션을 취하는 거다.
(2) 그리고 시간에 리듬을 탄다. 이 기술은 노년에 더욱 필요하다. 메 순간을 나 스스로 과정으로써 즐길 수 있어야 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죽음도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다.
(3) 그리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산다. 그러는 가운데 인간, 자연 그리고 내가 늘 만나는 사물들과 우정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상품 소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작고 있는 물건을 깨끗하게 하고 변형시켜 나에게 맞는 물건을 고쳐 사용하면, 신상품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이를 프랑스에서 '브리콜라주'라 한다. 그러면 물건의 수를 줄일 수 있다. 이게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는 거다.
(4)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를 해야 할 친구를 만난다. 그렇게 친구들을 만나 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는 웃는다. 그리고 웃어야 한다. 왜냐하면 웃음은 생명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활동으로써 웃음과 이야기를 연마하고, 내면에서는 어제 몰랐던 것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내적인 충실함과 외적인 활동이 리듬을 타야 한다. 고미숙은 이런 일상을 줄여서 이렇게 말한다. "명랑하고, 지혜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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