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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동지에는 동지팥죽을 먹는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2월 21일)

오늘은 밤이 연중 가장 긴 때인 24절기의 22 번째 절기인 동지이다. 동지는 일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지만, 태양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동지를 ‘아세(亞歲)’ 곧 ‘작은 설’이라고 부르며 설 다음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여겼다. 동지 이후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를 두고 양의 기운이 싹튼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 주나라에서는 동지를 설로 삼았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에 "동짓날은 만물이 회생하는 날'이라고 하여 고기잡이와 사냥을 금했다고 하고, 고려와 조선 초기의 동짓날에는 어려운 백성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왕실에서는 동지를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해 달력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러한 풍습은 단오에 부채를 주고 받는 것과 함께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였다. 추운 겨울날의 동지, 이웃에 달력을 선물하고 헐벗은 이와 함께 팥죽을 나눠 먹으며, 모든 영, 육 간의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해를 맞는 거다.

그리고 동지에는 동지팥죽을 먹는다. 동지가 동짓달 초승에 들면, 애동지, 중순이면 중동지, 그믐께면 노동지라고 한다. 애동지에는 팥죽 대신 팥 시루떡을 쪄서 먹었는데, 요즈음은 가리지 않고 팥죽을 먹는다. 팥죽을 쑤면 먼저 사당에 차례를 지낸 다음 방과 장독, 헛간에 한 그릇 씩 떠다 놓고, "고수레!"하면서 대문이나 벽에다 죽을 뿌린다. 붉은 팥죽으로 악귀를 쫓는 의식이지만 한편으론 겨울에 먹을 것이 부족한 짐승들을 배려한 것이다. 그런 다음 식구들이 팥죽을 먹는데 마음을 깨끗이 하고, 새해를 맞는 의미가 담겨 있다.

팥죽에 빠지지 않는 게 새알심 또는 옹심이다. 나는 최근 감자 옹심이를 파는 식당을 알게 되었다. 쫄깃쫄깃한 감자 옹심이는 속을 따뜻하게 하고, 든든하게 한다. 팥죽에는 좀 다른 새알심을 넣는다. 이건 두 손으로 정성스레 만들어야 한다. 새알심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팥죽을 쑬 때 터져 맛이 확 변한다. 새알심은 팥죽에 그저 곁들이는 부속물이 아니라, 맛을 좌우하는 '핵심'이자, 많은 사람의 공력이 들어가는 '정성'이다. 나는 그걸 먹을 때마다, 세상에 새알심 같은 존재가 되기로 다짐한다. 오늘 아침 시는 문재학 시인의 <동지팥죽의 추억>이다. 그리고 사진이지만, 한 해 동안, 아껴 주시고 보살펴 주신 모든 분들께 이 팥죽을 바친다.

동지팥죽의 추억/문재학

사립문 밀고 들어서면
한없이 포근한 가족의 온기(溫氣)
초가지붕위로 피어오르는
아스라한 그날

도란도란
화롯가에 둘러앉아
환담(歡談)속에 굴리던 새알

한 살 더 먹는 나이 수만큼 먹으라는
그 새알들. 동지팥죽
솥뚜껑 소리에 익어갔다.

호롱불에 타던 기나긴 밤
문풍지 울리는 설한풍(雪寒風)에
자리끼도 얼던 동지 날

잡귀(雜鬼) 물리치려 집안 곳곳에
솔가지로 뿌리던 동지팥죽
새하얀 눈 위를 붉게 물들였다.

가족 안녕을 비는
어머니 지극정성에 강추위도 녹았다.

세월의 강물에 출렁이는
꿈결같이 아련한
그 시절이 그리워라.

동지는 우리들에게 희망을 보라고 한다. 밤의 길이가 길다는 동지를 다르게 생각하면, 오늘은 낮이 가장 짧은 날이 아니라, 오늘부터 낮의 길이가 길어 지기 시작하는 날이다. 가장 짙은 어둠에서 빛이 가장 잘 발휘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 오히려 희망이다.

"끊임없는 물음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결코 희망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시인 박노해) 희망이란 절망을 처절하게 경험한 인간들이 피워내는 불씨다. 희망이란 가치는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만드는 이상을 저버리지 않고 작동시키려는 엔진이다. 인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춥고 배고픈 육체적인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삶이 무의미하며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체념이었다.

희망의 별은 책이나 논쟁에서 발견될 리가 없다. 그 희망의 별은 고개를 숙이고 발 아래 땅만 쳐다보며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려는 이기적인 인간이 볼 수 없는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고개를 높이 들고 밤하늘에서 자신만의 별을 발견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 별은 자신만이 찾을 수 있는 빛나는 별이다. 희망이란 가축 먹이통 구유와 같이 자신의 일상에서 가장 흔한 것에서 발굴되는 보석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상을 지속가능 하도록 계속 잘 유지하는 자에게 희망이 보인다.

모든 것을 잃었다 해도 희망만 남아 있다면, 거기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희망은 항상 출발이자 영원한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은 길과 같다. 언젠가 최진석 교수의 글을 읽고, 갈무리해 주었던 것을 오늘 아침 다시 공유한다.

인문 운동가는 시대의 병을 아파한다. 그리고 그 병을 치료하는 데에 헌신한다. 그러니까 인문 운동가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과 시대를 치료하는 일을 일치시키려 한다. 인문 운동가 자신이 독립적으로 발견했지만, 그 병은 시대의 모두에게 해당된다는 점에서, 인문 운동가가 하는 일은 공적(公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윤리적(倫理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온 몸을 바쳐 치료에 헌신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대의 병을 자신이 고수하는 생각의 틀에 맞춰 해석하고 치료하려 덤비면 오히려 해가 된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지식도 필요하고, 개방적이며 융통성 있는 심리상태도 필요하다. 게다가 병은 대부분 앓아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일 가능성이 크다. 굳고 철 지난 마음으로 새롭게 등장한 병을 다루게 되면, 병은 치료되지 못하고 악화되거나 더 수선스러워질 수 있다.

'텅빈 마음'으로 시선을 새롭게 하여 새로 등장한 병을 대면하고, 그것을 치료하려 거기에 자신을 전부 던지는 사람이 인문 운동가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를 높은 시야에서 넓게 보는 인문 운동가는 자신에게만 필요한 것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 예를 중국의 루쉰(魯迅)에게서 본다. 물질문명의 발전은 정신문명의 발전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이행되려면 여기에는 정신적 통합으로 빚어진 일치된 단결이나 공동의 선을 향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사회통합'이라고 한다.

일본은 이 사회통합을 위한 정신문명을 위해 요시다 쇼인이 있었다. 그는 '대화혼(大和魂)'이라는 일반 통합의 정신을 제시하며, 인물들을 배출하고 일본 정신을 통합하고 방향을 제시하였다.  중국에서는 루쉰이다. 그는 원래 의사가 되어 중국인들의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려고 하다가 과거에 갇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정신을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후 바로 의학 공부를 그만두고 문필가, 사상가, 혁명가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다.

이 둘을 보면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권이나 정치 집단 차원의 어젠다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어젠다가 필요하다. 통합을 이루려면 어젠다가 그 이전의 것들보다 높고 넓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 루쉰같은 인문 운동가는 없지만, 국민들이 이번 사태에서 보여주었다. 이런 통합을 위해 국가 어젠다를 제시하는 리더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사회 대개혁의 어젠다를 만들어야 한다.

루쉰의 경우, 그는 공적이고 윤리적이었다. 그가 의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이유가 단순히 동포들의 병든 육체를 고쳐주는 것에 머물지 않았다. 무엇보다 높고 큰 틀에서 새로운 중국을 꿈꿨다. 그는 수업 시간에 본 영화에 충격을 받았다. 러시아군의 밀정 노릇을 하다 붙잡힌 중국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처형되는 장면에서, 중국인들은 동포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빙 둘러싸서 구경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 가운데 일부는 박수치고 환호까지 한다. 루쉰은 이 장면을 보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때 이후로 나는 의학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우매하고 연약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온전하고 건장하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 없는 시위의 구경꾼밖에 될 수 없고, 병사자가 아무리 많다 해도 이를 불행이라 여길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 중국인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정신을 뜯어고치는 것이고, 정신을 뜯어고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학예술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문학예술운동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喊>>, "自序')

그 결과로 루쉰은 스스로의 인생항로를 전혀 다른 각도로 바꾼다. 루쉰은 말한다. 우매하고 연약한 국민은 바로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자기 자신의 생명이 좌우되는 일에서 마저도 구경꾼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 구경꾼들은 비판하고 분석하는 데에 재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분석 비판 후에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스스로 인정하면서 진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인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갖기도 한다. 그 우월감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에 매우 효용적이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은 자신에 옳은 사람으로 남는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웃음을 사지만, 자신은 알지 못하고 또 알더라도 인정을 하지 않는다. 루쉰의 고뇌는 늙고 병든 중국이 이런 구경꾼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구경꾼이면서 또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옳은 사람으로 조작해버리는 우매한 사람을 '아Q(阿Q)'라 이름 지었다.

<<아Q정전>>의 앞 부분에 나오는 대목이다. "건달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그저 그를 놀려 대며 마침내는 손찌검까지 했다. 아Q는 형식상으로는 졌다. 건달들은 그의 노란 변발을 휘어잡고 담벼락에 소리가 나도록 네댓 번 머리를 짓찧었다. 놈들은 그제야 이겼노라고 흡족해 하며 가버렸다. 아Q는 잠시 멍하니 서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 놈에게 얻어맞은 셈이야. 요즘 세상은 정말 말이 아니야.' 그러고는 흡족해하며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아Q는 건달들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아들놈에게 얻어 맞은 꼴로 바꿔 버렸다. 이것을 '정신승리법'이라고도 하는데, 아비를 때린 아들이 나쁜 놈이기 때문에, 나쁜 아들의 역할을 한 건달들이 나쁜 놈들이므로 자신은 오히려 선을 지탱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긴 거나 다름 없는 것으로 해석해버린다. 현실에서 패배를 정신적인 승리로 바꿔서 자위하는 비굴한 모습이다.

루쉰은 아Q를 통해 외세에 늘 시달리면서도 외세를 멸시하고 게다가 스스로 조작한 우월감이나 안정감 속에 빠져 있는 그의 조국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Q들은 펼쳐지는 판을 자신의 방식대로 혹은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기대에 따라서 해석한다. 심리적 기대를 객관적 사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구경꾼들은 대개 구체적인 현실보다는 가지고 있는 고정된 생각에 더 집착한다. 현실은 두텁고 유동적이지만, 고정된 생각은 얇고 고정적이다. 얇고 고정적인 생각으로 현실을 지배하려다 보면, 항상 현실에는 삐져나오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여분의 현실은 '정해진 생각'의 제어능력을 벗어난다. 여기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정당화, 정신승리법 밖에 없다. 아Q가 정신승리법에 빠져 있는 이유이다.

요시다 쇼인이나 루쉰은 모두 아Q로 살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사람들이었다. 아Q들을 끌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봉우리를 넘으려고 애썼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자신도 해방되고, 민중들도 해방시켰다.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 할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땅 위에 있는 길과 같다. 사실 땅에는 본래부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다 보면 길이 생겨났다." (<고향>)

넓고 큰 시야를 가지고, 먼저 발을 내디딜 것인가, 아니면 분석과 비판을 일삼으며 구경만 할 것인가? 구경꾼의 무리에서 나와 갇히고 고정된 마음이 아니라 미래로 활짝 열린 마음으로 두려운 첫 발 내딛어야 한다. 다행히 최근 우리 사회의 시위 현장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우리들에게 희망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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