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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시간의 강'은 무심히 흘러 또다시 한 해가 저문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매주 일요일 아침 글쓰기에는 '이슈 화이터'들의 책이나 인터뷰를 읽고, '리-라이팅'하는 시간을 가질 계획이다. 오늘 아침은 <풍요중독사회>를 쓴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인 김태형를 만난다.

'시간의 강'은 무심히 흘러 또다시 한 해가 저문다. 어느 해 든지 다사다난 했지만, 코로나-19로 그 말 많았던 2020년도 거의 다 지나갔다. '방역의 일상적 삶'이라는 흔들리던 세상에서 꿋꿋하기 위했던, 시끄러운 세계에서 평정하기 위했던, 밀어내는 사회에서 오히려 밀고 가기 위해 온 힘으로 견뎌온 기쁨과 슬픔, 성취와 후회의 날들이 벼락같이 지나갔다. 올 초에 어떤 마음을 품었더라도 이제 시간은 고작 열흘이 남았을 뿐이다. 분주히 부산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조용히 우리 자신을 되 돌아볼 시간이다.

망년을 생각하면, 마음에 불꽃같은 것이 타오르나, 송년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물처럼 고요할 수 있다. 선비들은 탕탕평평(蕩蕩平平), 싸움, 시비, 논쟁 따위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공평하게, 흐르는 강물의 흐름에 마음을 맡김으로써 생각을 돌이키고 품행을 다듬는 기회로 삼았다고 한다. 시간이 물처럼 느껴지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들여다보면 고요해질 수 있고, 고요해지면 살필 수 있고, 살피면 닦을 수 있고, 닦으면 삶의 이정표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인생은 얼마나 다행인가. 때를 맞아 성찰함으로써 새롭히고 새롭히고 또 새롭혀서 올해와 다르게 내년을 살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생활 속 거리 두기를 강하게 요구하는 이 시점에서 물처럼 고요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지금 불안하다. 더 큰 문제는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 불안의 원인을 정확하게 모른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그 불안을 돈으로 어떻게 든 방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서 돈에 올인한다. 그래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고, 더 불안하다. 그리고 사회적 차원에서 사람들은 경제 성장에만 관심을 갖고, 평등과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불안해 할까? <풍요중독사회>를 쓴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인 김태형은 "불안의 근본적인 내용은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이라고 말한다. 이 둘 중에서 사람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존보다도 오히려 존중이다. 배고픔보다무시당하는 것을 더 견디기 힘들어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라면 그건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 오히려 공감능력을 키워준다. 역지사지하는 힘으로. 그러나 문제는 타인을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 한테서 나쁜 평가를 받게 되고 무시당할까 봐 두려워서 그런다는 점이다. 따라서 상대방이 나를 좋게 보도록 만들기 위해서 자기를 위장하기도 하고, 또는 겉치레로 명품을 사려는 식으로 나타난다. 김 소장은 이걸 "존중불안"으로 보았다. 이게 사라진다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성향은 좋은 쪽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 사회는 다층적 위계 사회인데, 더 나아가 높은 위계에 있는 사람들은 밑의 사람들이 자기만큼 위계가 올라오는 걸 싫어한다. 밑의 사람들의 위계가 올라온다는 것은 자기 위계가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 차별을 받아서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다른 편으로 차별을 필요로 한다. 격차를 줄이거나 위계를 없애자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잘 협조를 안 한다. 우리 사회는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사회라서 일단 자기가 차지한 위계에서 더 위로 올라가는 데 관심이 있다. 그래 돈 벌려고 죽도록 일만 한다. 다층적 위계 사회 자체를 없애는 데는 큰 관심이 없다. 그래 김소장은 생존 불안부터 줄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내가 너무 사는 데 팍팍하고 먹고 살기가 힘든 상황에서 세상을 바꾸자 하거나 또는 더 좋은 미래라는 따위 이야기는 귀에 잘 안 들어 온다. 오로지 자신에게 닥친 이 생존 위기를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니까 생존 불안을 줄여줘야 사람들이 비로소 사회 참여나 사회개혁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늘 아침 시구처럼, "하얗게 빛 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영구혁명 중인 청춘을 살고 있는 셈이다. 연말까지 침잠의 시간을 갖고 많이 읽고 많이 쓰며 송년(送年)할 생각이다. 그리고 내년에도  가진 것만큼 만족하고 남의 것 탐내지도, 보지도 아니하며, 누구 하나 마음 아프게 하지 아니하고, 누구 눈에 슬픈 눈물 흐르게 하지 아니하며, 오직 사랑하는 마음 하나 가슴에 담고, 물 흐르듯, 구름 가듯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이름은 남지 않더라도, 가는 길 뒤편에서 손가락질 하는 사람 없도록 허망한 욕심 모두 버리고 양보하고 덕을 쌓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적절한 '균형 맞추기'로 건강하고 싶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를 소개한 채상우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청춘(靑春)'은 'youth'의 번역어다. 현재 이 단어는 십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 등 사람살이 가운데 특정한 생물학적 시간대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애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어떤 상태, 즉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고 사회에 편입되지 않은 만큼 세속화 이전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가 속한 세계의 이념과 체제에 복속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비록 무모하고 철없어 보일지라도 새로운 가능성과 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그런 낭만적 광휘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나 가능하고, 아니 그보다 자기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한다고." 시인의 청춘은 지나가는 지 모르지만, 내 청춘은 아직 남아 있다.

내 청춘이 지나가네/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음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 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 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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