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3년 12월 17일)
눈이 내린 주일 아침이다. 습관대로, 이미 구독한 이런 저런 칼럼들을 읽다가, 천재연구가라고 소개하는 조성관 작가의 글(아시아경제, '조성관의 인문여행')에 흥미로운 두 개의 문장을 만났다. “업보(業報)는 절대 번지수를 잊지 않는다.” 이 표현과는 다르지만 성경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뿌린대로 거두리라"가 그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간다”는 주일 목사의 설교도 결국 업보에 관한 말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런 말도 전해진다. ‘인과응보는 시차(時差)는 있어도 오차(誤差)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세상의 두 가지 법칙이 있다. 하나는 '세상에 카르마(業)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 지으면 그 벌을 받는 게 순리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운이 좋아 이번 생에 죄값을 안 받았다면 후손이나 다음 생에 벌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 제 1법칙은 업보 안 쌓고 남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싫어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냥 무시하면 된다. 왜냐하면 내가 벌하지 않아도 상대가 계속 죄를 쌓고 있다면 언젠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거다. 굳이 나서서 싸울 필요 없다. 그러나 갑자기 삶이 단순 해진다. 두 번째 법칙은 '세상의 모든 거래는 트레이드 오프(trade off, 어떤 것을 얻으려면 반드시 다른 것을 희생하여야 하는 경제 관계)라는 것'이다. 뭔 가를 얻으려면 그만한 비용을 내야 한다. 내 스타일로 말하면, 세상에 가짜는 있어도 공짜는 없다. 공짜로 얻는 건 없고 어쩌다 운이 좋아 뭔가를 쉽게 얻었 어도 신은 때가 되면 그 값을 받아 가기 마련이다. 이 두 법칙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각자 자신만의 원칙들을 몇 가지 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착하게는 못 살아도 나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항상 정당한 비용을 내려고 노력한다. 친해지고 싶지 않은 상대에겐 사소한 부탁도 안 한다. 모든 은혜는 어떤 식으로든지 갚아야 하기에 마음의 빚을 함부로 쌓지 않는다.
업보/강민숙
그림자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다
나는 내가 무거워
햇빛 쨍한 날
내 그림자를
먹어버렸다
내 속이
시커먼 까닭이다.
조성관 작가의 칼럼에서 만난 두 번째 화두는 “좋은 죽음은 좋은 인생 뒤에만 오는 법이야”이다.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의 주인공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 유령 세 명을 만난다. 첫 번째 유령은 그의 어린 시절을, 두 번째 유령은 그의 현재를, 마지막 유령은 그의 죽은 뒤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 번째 유령이 데려다 준 곳의 집에서는 부부가 어떤 이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단 한마디도 망자를 안타까워하거나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 죽었다고 비웃는다. 스크루지는 묘지를 가보고 그 망자가 바로 자기 자신의 미래라는 것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이런 어록을 남겼다. “죽음보다는 추한 삶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스크루지는 자신의 ‘추한 삶’을 미리 가서 보고 개과천선해 새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 ‘크리스마스 캐럴’의 메시지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메시지도 비슷하다. 인간이 양심을 저버렸을 때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가를 볼 수 있다.
죽음은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망자의 입장에서 본 죽음과 유족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죽음이다. 먼저 유족의 입장에서 본 부모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자. 유족은 부모가 고생하지 않고 돌아가 시길 바라면서도 자식들과 ‘죽음의 의례’를 거치길 희망한다. 자식들 얼굴도 보고 손주들도 보고 말이다. 그 소망을 압축한 표현이 '9988234'다. '구십구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 아프고 사흘째 죽는다'. 그러나 죽는 사람은 다르다. 그들은 ‘죽음의 의례’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죽음의 의례’에는 곧 고통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고 견디는 것은 온전히 죽어가는 사람의 몫이다. 그 어느 누구도 대신하지 못한다. 찰리 채플린은 1977년 12월25일 스위스 자택에서 잠을 자다 영면했다. 천수(天壽)를 누린 채플린은 어떻게 죽는 순간까지 그런 천복(天福)을 누렸을까? 나는 세상 사람을 웃게 해준 채플린에 대해 신이 보여준 최소한의 감사 표시라고 조성관 작가는 생각했다. 다른 이를 웃게 하는 것은 복 받는 일이다.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디킨스가 1861년에 발표한 작품이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에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인물은 조 가저리(Joe Gargery)다. 허영에 물든 신사의 세계를 동경해 신사를 흉내 내는 필립 핍(Philip Pip)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조 가저리는 누나의 남편이다. 평생 성실한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우직한 소시민이다. 그런데 런던 신사의 세계에서 한때 잘 나가던 핍이 나락으로 떨어져 그를 찾아온다. 가저리는 그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도와준다. 디킨스는 말한다. 잘 사는 인생이란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성실하게 직분(職分)을 다하는 것이라고. 이를 파블로 피카소는 조금 근사하게 변형시킨다. "삶의 의미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것이고, 삶의 목적은 그 재능으로 누군가의 삶이 더 나아지게 돕는 것이다."
자신이 비록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한발 짝 더 내디뎌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감동을 준다. 이것이 바로 어떤 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모든 창의적인 일이나 사회적인 공헌 등은 우선 자신이 확장되어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공적인 역할로 자리잡은 경우이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하나의 수고가 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수고가 있어야 세상은 더 나아지고, 동시에 자기 자신은 더 성숙해진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다. 한 개인의 능력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하나의 역할만을 담당하고 산다. 세상 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우리는 '직(職)'이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행위의 결과에 따라 성숙해 간다. 당연히 모든 행위는 사실 수행(修行)이며 거기에 자신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특정'한 역할(職)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業)한다. 이것이 바로 '직업(職業)'이다. 인간은 '직업'을 잘 수행함으로써 사회적이고 공적인 존재로 확장한다. 바로 '직업인'이다.
문제는 '업(業)'이다. 자신이 맡은 역할(職)을 전인격적인 태도로 대하느냐, 아니면 기능적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전인격적인 태도는, 마음은 다른 곳에 두고 정해진 일만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의 궁극적인 의미를 살펴서 거기에 온 마음을 두고 기꺼이 불편함과 수고를 받아들여 조그마한 확장성이라도 시도해 보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을 하나의 수행처로 삼아야 한다. 그 역할을 통해서 자아가 완성되고 실현된다는 지속적인 각성을 하고, 항상 정성스러운 마음가짐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마음이 떠난 상태에서 자신의 역할을 기능적으로만 대한다. '직'과 '업'이 분리된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직업인'이 아니라 그냥 '직장인'이라 한다. 한 사회의 건강성과 진보는 구성원들이 '직업인'으로 사느냐, '직장인'으로 사느냐가 좌우된다.
인생을 살아보면 깨닫게 된다. 평생 직분을 다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직책이 부여하는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다하는 일. 소방대원은 사람들이 내려오는 길을 거꾸로 올라가는 직업이다. 소방대원의 직분은 내려오는 계단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이다. 소방대원이 연기 자욱한 계단을 올라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어떤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 각 부분에서 자기 직분에 충실한 사람들 덕분이다. 한 번 뿐인 인생에서 잘 사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아침 공유하는 사진처럼, 한여름의 격정을 다 떨궈버린 겨울 산을 볼 때마다 자문하곤 한다. ‘메멘토 모리", 당신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지금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아닐까?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만큼 인생에서 명확한 답은 없다. 죽음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면 우리의 삶은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전진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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