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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많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3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2월 15일)

어제 말했던 것처럼, <교수신문>은 올해를 마무리하는 사장성어로 "과이불개(過而不改)"를 1위로 선정했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올해였지만 희망과 기대는 잠시 뿐이었다"며 “김건희 여사의 박사학위 논문 검증부터 윤석열 대통령의 ‘바이든·날리면’ 발언 사태, 그리고 인재로 발생한 이태원 참사(10.29)까지, 제대로 된 해명과 사과는 없었고,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행태가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다”고 보도했다. 1위를 차지한 "과이불개"는 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이 추천했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 여당이나 야당할 것 없이 잘못이 드러나면 ‘이전 정부는 더 잘못했다’ 혹은 ‘대통령 탓’이라고 말하고 고칠 생각을 않는다”라며 “그러는 가운데 이태원 참사와 같은 후진국형 사고가 발생해도 책임지려는 정치가가 나오지 않고 있다”라고 추천 이유를 말했다. 박 교수는 이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니 잘못(過)을 고쳐서(改) 좋은(善) 쪽으로 옮겨간(遷) 사례가 여럿 있었다. 세종은 사람을 잘못 임명해 외교망신을 당했을 때 ‘사람을 잘못 알고 보낸 것을 심히 후회한다라고 말했고, 미리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역질(역병)로 함경도 백성들이 많이 죽은 일에 대해서 ‘크게 후회한다’고 했다”며 세종대왕이 성군이 된 실마리를 후회와 개선에서 찾기도 했다.

"과이불개"를 선택한 교수들의 선정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설문에 답한 60대 인문학 교수는 “많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며 “인정하지 않으니 사과할 이유가 없고 그러면 고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교수들도 “현재 여야 정치권의 행태는 민생은 없고, 당리 당략에 빠져서 나라의 미래 발전보다 정쟁만 앞세운다(40대·사회)”거나 “여당이 야당되었을 때 야당이 여당 되었을 때 똑같다(60대·예체능)”처럼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소인배의 정치를 비판했다. "과이불개" 해법으로는 “입법, 행정 관계없이 리더의 본질은 잘못을 고치고 다시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솔선수범하는 자세, 마음을 비우는 자세에 있다(60대·사회)” “남 탓보다는 제 탓하기(60대·의약학)” “자신부터 성찰하는 한국사회(50대·인문)” 등을 제시한 답변이 많았다.

"‘과이불개"는 <<논어>>의 <위령공편(衛靈公篇)>에 처음 등장한다고 한다. 공자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즉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고 했다. 윤정구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잘못을 하고도 잘못을 덮는 데만 급급해 국민들은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더 도드라지게 알게 되었고 결국은 나라에 계란(잘못)이 쌓이고 싸여 언제 어디서 어떻게 깨지고 무너질지 모르는 '누란지국'이 되었다"로 종합했다.

윤정구 교수에 의하면, 진성리더십에서도 리더의 자질을 "학습하는 죄인"으로 규정한다. "학습하는 죄인"이란 말이 인상적이다. 그건 "인간은 신과는 달리 과거에 의해 답이 알려지지 않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실수를 피할 방법이 없다. 이런 와중에도 변화를 선도해야 하는 리더에게 학습이란 이 실수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들여 잘못이 고쳐져서 다음 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되어감(Becoming)"이라 했다.

리더의 학습력이 중요하다. 리더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거다. 우리는 "자신의 잘잘못이 남들에 의해 파헤쳐 져 끌려 나오기 전에 자신이 먼저 허심탄회하게 자복하는 용기에서 나온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에 대한 학습을 통해 성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잘못에 대한 자복은 인지상정으로 용서를 불러온다. 사람들이 리더를 용서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부하나 남들에게 덮어 씌우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자복이란 '저지를 죄를 자백하고 복종함 또는 항복함'이란 뜻이다. 자기의 범죄 사실을 고백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잘못을 먼저 자복하고 학습을 통해 고치려는 진정성을 보이면 누구나 용서받고 '개과천선(改過遷善)'의 기회까지 제공받는다. 인간이 용서받지 못할 때는 자신의 잘못을 자복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실수하지 않는 절대자라도 된 듯이 남에게 자신의 잘못까지 덮어 쒸워 가며 하는 '신 흉내'가 점입가경에 도달해 결국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지켜야 할 본분도 망각했다고 판단 될 때이다."(윤정구)

"과이불개"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과 소인배 정치를 보여주는 거다. 진영 간 이념 갈등이 고조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패배자가 될 것 같은 강박에 사로잡혀 일단 우기고 보는 풍조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정치가 무엇인지 묻는 한 권력자의 물음에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이다”(政者正也)라 정의했다. "정치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과 실천의 문제이지 힘과 이익의 다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 정치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옳은 것(또는 이해의 공평한 배분)이라는 본래 목적을 잊고 그저 권력이라는 수단에 매몰된 것처럼 보인다. 진영의 논리가 앞서는 정치는 옳고 그름의 문제를 모두 대결의 논리로 빨아들인다. 가령 현 정부의 반민주, 반헌법적 통치를 비판하면 바로 상대 진영의 주장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정치가 이렇게 진영 선택의 문제가 되고 권력 교체에 불과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협소하고 졸렬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나라의 양당제 정치 때문일 것이다. 선거가 곧 정치가 되었고, 우리는 더 이상 선택과 상상의 여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4월의 책> 대표 안희곤의 글에서 읽은 거다.

그리스 철학자 필론이 소환되는 아침이다. 그는 여행 중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우를 만났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은 신을 찾으며 울부짖었다. 그도 죽음이 두려웠지만, 명색이 철학자인지라 다른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할 수 없어 배 아래 창고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폭풍우와 사람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돼지 한 마리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돼지 옆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한참 후 날씨가 좋아졌고 다 무사했다. 이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임을 하였다. "밖에서 안 좋은 일을 겪은 시인은 방에서 필론처럼 자는 척한다. 그때 “벌 한 마리”가 방에 들어와 소란을 피운다. 애써 외면한 풍파의 틈입이다. 벌은 문이 열려 있음에도 창호지에 “머리 처박다 떨어졌다 다시 처박는”다. “스스로 발라놓은” 의식에 갇혀 사는, 허세와 위선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자기 생각만을 강요한다. 진실도, 용서도 절대적이지 않음에 시인은 회의에 빠진다. 판단을 유보한 채 세상과 거리를 둔다. ‘마음의 평정’을 찾기는 그른 것 같다." 나도, 현실 정치 판만 들여 보면, 요즈음 시인과 같은 심정이다.

필론의 돼지/이위발

필론의 돼지처럼
잠자고 있는 것을 흉내 내고 있는데
벌 한 마리 방 안에 들어와
머리 처박다 떨어졌다 다시 처박는데
열려 있는 문 보지 못하고 창호지만 두드리다
어느 사이 빠져나갔는지 모른다
의식이란 스스로 발라놓은 창호지 같아
진실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진실이
나의 진실이 아닐 수도 있는데
하늘 높아 보일 때 사람들이 외로워 보여
높은 것을 싫어하듯
내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 곁에서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듯
돼지는 뒷걸음질 치며 악을 쓰고 있다
용서할 거리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에게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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