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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민주주의에서는 투명성이 중요하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2월 10일)

어떤 프로젝트을 얻어 사업을 하면, 11월 30일에 그 사업을 끝내야 한다. 그리고 12월 초에는 결과물을 제출하는 바쁜 시기이다. 어쩌다 마을 일을 하면서, 올해는 4 가지 사업을 수행했다. (1) 우리마을대학이 진행한 <골목 경제 활성화 프로젝트>-온라인 시스템 구축 (2) 우리마을대학 <토요학교> 운영 (3) 우리마을대학 협동조합 설립 및 관광두레에 선정되고 1년차 사업 수행 (4) 우리마을 스마트 골목길 프로젝트-교통과 주차 문제 해결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신성마을연구소> 설립 등 벅찬 일년이었다. 지금 되돌아 보니 코로나 시국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가열차게 활동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서로 도우며 그 프로젝트들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일인 가구를 위한 반려 식물 키우기> 사업도 진행했는데, 코로나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제는 그 문제까지도 잘 마무리 했다.

가장 큰 어려움 전자세금계산서를 발행하는 일이었다. 무려 황금 같은 오전 4시간을 소비하여 발급에 성공하고, 제출하였다.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시도하고, 은행가 묻고, 또 시도하고 시도하여 해결하였다. 나이가 들수록 다른 이에게 의존하면, 그럴수록 더 무능 해진다. 배우고 또 배우는 거다.

유대인들의 <<논어(論語)>>인 <<선조들의 어록>>은 모든 구절이 짧지만 근본적인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상상을 초월하는 답으로 구성돼 있다. '선조들의 어록' 4.1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벤 조마가 말한다. 누가 진실로 지혜로운가?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다. 경전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의 모든 스승으로부터 분별을 배운다. 왜냐하면 당신의 증언들이 나의 묵상이기 때문이다.'

누가 진실로 강한가? 그는 자신의 충동을 조절하는 사람이다.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내기를 더디 하는 사람이 힘센 사람보다 강하다. 자신의 영혼을 조절하는 사람이 도시를 정복한 사람보다 강하다.'

누가 진실로 부자인가? 그는 자신의 삶에서 자신에게 할당된 분깃(유산중 나의 몫)에 만족하는 사람이다.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이 손노동의 열매를 먹을 때, 당신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다음 세상에서 풍족할 것이다.'

누가 존경을 받을 만한가? 그는 모든 인간을 존경하는 사람이다.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를 높이는 사람들을, 나는 높일 것이다.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나는 무시할 것이다.'"

벤조마의 원래 이름은 시므온 벤 조마로, 탈무드 시대(기원후 2세기 전반)에 '조마의 아들(벤)'로 알려졌다. 그는 히브리 성서를 자신의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재해석하고 번역하는데 뛰어난 재주를 지닌 학자였다. 그는 박학다식하다고 존경을 받았지만, 공식적으로 유대학자의 최고 명예 '랍비'로 불리는 명예를 추서받지 못했다.

벤조마의 명언은 눈을 감아야 비로소 떠오르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대상을 분명하게 보기 위해서는, 때때로 눈을 감아야 한다. 사물을 보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육안으로 사물의 겉모습을 보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눈을 감고 그 대상이 지닌 숨은 의미, 그 비밀을 꿰뚫어보는 시선이다. 벤조마의 깨달음은 눈을 감을 때 떠오르는 지혜다.

우리가 눈을 뜨면, 엄청난 지식을 지닌 유명한 사람을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을 감으면, 우리는 지혜가 많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깊음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의 마음은 호기심으로 가득하고 그의 언행은 겸손하다. 호기심과 겸손이 지혜의 표시다.

무념(無念)에서 여운(餘韻)까지/김단

뎅그랑 뎅그랑
이른 새벽 고즈넉한 산사에 앉아 두 귀를 여니
은은한 풍경 소리가
소음에 찌든 귓전을 간지럽힌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념(無念)의 문을 여니
백 년 전의 물소리와 천 년 전의 바람 소리가 벌거숭이 나무를 지나 살그머니 열린 모공 사이로 스며든다.

아!
하얗게 시린 계절
눈 앞에 펼쳐진 능선에선 갈 길 바쁜 햇살이 뿌옇게 탈색된 시간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그림자보다 더 서러운
인연의 흔적을 쫓아가고 있다.

자크 아딸리는 "위협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다.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중요하다. 위협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느 의미에서 위협은 삶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위협 속에서 용수철 같은 힘도 솟는 것이다. 그게 생명력이다. 그 힘은 어려움 앞에서 더 솟아오른다. 우리는 유약한 삶을 흔히 '온실 속의 화초'에 비유한다. 편안함과 안전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온실 속의 화초가 되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멋진 삶을 꿈꾸는 이에겐, 위기, 위협, 고통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할 대상이다.

민주주의에서는 투명성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궁극적으로 민중들이 권력을 가진 제도이기 때문이다.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권력의 주인은 국민이기에 권력은 언제나 자신의 작동 시스템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보고해야 한다. 누군가가 숨어서 장난질을 친다면 권력의 주인인 국민들은 권력 작동 시스템에서 배제된다. 이런 제도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윤핵관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윤석렬 핵심 관계자'를 줄인 말이다. 문제는 이런 권력은 절대로 국민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건 대놓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이다. 심각한 일이다.

과거를 기억할 때 우리는 과거의 일부만을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 버린다. 그런데 분명히 기억나는 것이나 망각한 것이나 중요도로 치면 같을 수 있다. 기억하는 것이라고 중요한 것도 아니고, 잊어버렸다고 해서 안 중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현재 주변의 모든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결국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분류할 때, 일부를 선택해서 그럴듯하게 짜 맞추고 나머지는 배제한다. 이러한 선택과 배제는 객관적인 기준 없이 독단적으로 행해진다. 포괄적이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다.

회복된 기억은 객관적인 과거를 되살려 낸 것이 아니다. 기억은 도구다. 기억은 우리를 미래로 인도하는 과거의 안내자이다. 우리가 과거에 나쁜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그 이유까지 떠올릴 수 있다면, 그런 나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억의 목적이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를 다시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안 좋은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는 걸 예방하는 도구이다.

진부는, 한자로 풀이하면, '썩은 고기(腐)'를 남들이 보라고 '전시하는(陳)' 어리석음을 뜻한다. 이렇게 고기가 썩는 줄도 모르고 남들에게 과시하는 사람을 가리켜 '진부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자신의 강점인 줄 알았던 고기 때문에 결국 망하고 만다.

반대되는 사람을 우리는 '참신한 인재'라고 한다. 참신은 한자어만 봐도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斬)'자는 고대 중국에서 죄인을 죽이던 극형 틀인 수레와 도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참신(斬新)이란 도끼로 치듯 과거의 구태의연함과 완전히 단절한다는 뜻이다. 과거와 결연히 단절하고 새로 태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소크라테스 식의 대화법이 자신들의 진부함을 스스로 헤아려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편견과 무지에 사로잡혀 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런 식으로 내가 참신한지, 진부한지는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참신한 인물에게는 자신의 본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채찍질을 하는 멘토가 있다. 그리고 예술가는 매 순간 진부함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자연도 진부함을 거부한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고 태양계와 같은 수많은 별들이 섬세한 침묵의 소리와 같은 블랙홀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이처럼 우리도 자기 자신이라는 블랙홀을 중심으로 단호하고도 숭고하게 회전하여야 참신한 사람이 된다. 숭고라는 말은 끝의 경계까지 밀고 나갈 때 드러난다.

‘진부함’이란 산의 정상에 오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친 나머지 산 중턱에서 머뭇거리는 상태를 뜻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침묵의 소리가 만들어 내는 길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따라가기 힘들어 중간에 멈춰 버리기 일쑤다. 진부함이라는 뜻의 영어 '미디오크러티(mediocrity, 프랑스어로는 mediocrite)'는 중간을 뜻하는 medi와 험한 산을 뜻하는 'ocris'의 합성어이기 때문이다.

진부한 사람은 자신 속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를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삶의 안무를 갖지 못한다. 자신만의 춤을 추지 못한다. 이 이유는 인간의 귀가 다른 삶들의 평가와 인정에 목 말라 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자신이 만들어낸 삶에 달려 있다. 이런 사람들은 남들이 써 놓은 책이나 관습에서 삶의 기술을 배우지 않는다. 남들의 생각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직접 행동으로 옮긴다. 자유를 아는 사람이다.

남의 것이나 따르는 삶이 계속되는 한 자신만의 고유한 문법을 만들어내는 참신한 삶은 찾아오지 않는다. 진부는 우리를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하는 끔찍한 훼방꾼이다. 썩은 고기를 믿지 말고, 버리고, 도끼로 치듯 과거와 단절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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