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몇일 전부터 사람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인문운동가에 퍽 다행한 일 아닌가? 인문운동가는 '사람이 먼저'라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던 중 "세상 모든 단어에는 사람이 산다"라고 주장하는 카피라이터 정철의 <사람사전>을 곁에 두고 닥치는 대로 펴본다. 즐거움이다. 오늘 아침 만난 '새벽'이란 단어의 뜻풀이는 이렇다. "어둠 끝에 새벽이 있다. 새벽 끝에 아침이 있다. 어둠-새벽-아침. 지구가 태어나고 어둠, 새벽, 아침으로 이어지는 이 꾸준한 공식이 흔들린 날은 단 하루도 없다. 공식은 어둠에게만 적용 되는 건 아니다. 고독 끝에도 새벽이 있다. 고통 끝에도 새벽이 있다." 내 생각도, 새벽은 어둠이 먼저이다. 내가 지금 어둡다면 새벽이 온다는 말이다. 지금 세상이 어둡다면, 새벽이 오려는 것이다.
나는 주님을 모시지 않은 날은 새벽에 일어난다. 그러면 먼저 양치를 하고, 혀를 닦는다. 그리고 차를 한 잔 마신다. 특히 식은 차를 마신다. 최근에는 작두 콩 차를 마신다. 난 '치망설존(齒亡舌存)' 이라는 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임종을 앞둔 노자의 스승 상용이 그를 불렀다. 그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였다. 상종이 자신의 입을 벌려 노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내 혀는 아직 그대로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빨은 있느냐?" "없습니다." "이게 무슨 까닭인지 너는 알고 있느냐?" "혀가 아직 그대로인 것은 그것이 부드럽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빨이 빠지고 없는 것은 그것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일이 이와 같다." 산상수훈의 제3복인 ③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란 말도 같은 이치이다.
나는 늘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삶을 늘 유지하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평범한 삶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일상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다. 건강해 지려면 운동, 영양, 수면 삼박자가 잘 맞아야 한다. 항목마다 들어가는 자원과 노력이 가볍지 않다. 그리고 평범한 삶의 최소 조건을 채우는 것조차 만만치 않다. 성공하면 그걸 지키느라 힘들고, 어려우면 매일 살아가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 어렵거나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침의 시처럼, 세상과 "으스름한 가락지"를 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난 최진석 교수의 몇일 전 시에 실망을 했지만, 오늘 아침에 그가 쓴 "책 읽고 건너가기"의 11월 책인 <노인과 바다>의 독후감을 읽고, 그 시를 이해했고, 코로나-19로 사는 이유가 흔들리던 참에, 큰 통찰을 받았다. 그 독후감에서 얻는 영감을 시를 읽고 정리해 볼 생각이다. 지난 주 나의 산책길 탄동천을 거다가 나뭇가지에 앉은 새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언젠가 모아 두었던 김남조 시인의 <새와 나무>를 기억하고 오늘 공유한다. <노인과 바다>의 어부 산티아고가 바다와 자신을 하나로 묶듯이, 새는 나뭇가지에 온 자신을 맡기었다. 나도 나 따라, 세상 따로, '따로 국밥'이 아니라, 그냥 국밥이 되길 노력할 테다.
새와 나무/김남조
작은 새 하나
가녀린 나뭇가지 위에
미동 없이 머문다
얼음처럼 깨질 듯한 냉기를
뼛속까지 견디며
서로 측은하여
함께 있자 했는가
모처럼 세상이
진실로 가득해진 그 중심에
이들의 화목이
으스름한 가락지로
끼워져 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고 그 나무속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이 풍경은 벽에 걸린 정물화처럼 이동이 없었고 견고했다. 비록 한파(寒波)의 때이지만 나무와 새는 친화적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파'를 세파(世波)로 이해해도 좋겠다. 나무와 새가 “가락지로 / 끼워져 있다”라는 표현은 멋진 표현이다. 둥근 쇠고리로 묶여 있으니 이 둘을 끊어 놓을 수 없다.
최교수는 <노인과 바다>에서 다음 문장을 뽑은 것 같다. "노인은 뱃전 너머로 몸을 기울여 상어가 물어뜯은 그 자리에서 물고기의 살점을 한 점 떼어내었다. 그러고는 그걸 입에 넣고 씹으며 고기의 질과 좋은 맛을 음미했다."
이게 세상과 하나가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노인과 바다>를 읽고도 이 문장을 그냥 지나쳤다. 지난 달 <데미안>에서 만났듯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천직)이란 다만 한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 로 가는 것. (...)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것이었다."
최교수는 독후감에서 말했다. "세상의 이치는 '어쩔 수 없이 부여 받은 각자 일'을 각자 자신의 임무로 알고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책 읽고 건너가기에서, 나는 건너가기를 '운(運)'의 세계에서 '명(命)'의 세계로 자발적인 이행(移行)으로 풀기 시작했다. 이 여행이 운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지금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삶의 목적을 원인으로 구성한 새로운 스토리의 일인칭 주체가 되어 자신을 구해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의 성장을 스스로 결정하는 '명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운에 의해 결정된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인 사명과 목적(명)을 깨닫고 이 명을 삶의 원인으로 삼아서 자신이 자신 삶의 주인으로 나서는 것으로 완결된다고 본다.
이어지는 글은 너무 길어 블로그로 옮긴다.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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