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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사람은 빵보다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2월 14일)

대한민국 운명의 날이다. 윤의 탄핵 투표가 오후 4시에 있다. 나는 탄핵을 믿는다. 다 때가 있고, 그 후 성숙한 우리 국민들의 민주 의식으로 잘 짜여진 로드맵 대로 사회가 안정되고,  갑진년의 푸른 청룡의 힘으로 에너지가 다시 모여 내년에는 도약하는 을사년이 될 것이다.

올 초 <인문 일지> 나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푸른 용의 해, 갑진년(甲辰年)이 밝았다. 용은 12가지 띠 중 유일하게 상상의 동물이다. 동아시아권에서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존재, 상서롭고 신령한 동물로 여겨왔다. 생명의 근원인 물을 관장하며 하늘로 승천해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어 왔다. 오늘날에도 용은 일상에서 자주 언급된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에게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하고, 용꿈은 최고의 태몽이나 길몽으로 여긴다. 지명으로도 많이 쓰여 전국에 1천261개나 된다.
1. ‘교룡득수(蛟龍得水)’: 용이 물을 만나 힘차게 날아오르듯, 위기 속에서도 새로운 기회를 찾고 여러 난관을 딛고 날아오르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2. ‘운외창천(雲外蒼天)’: 어두운 구름 밖으로 나오면 맑고 푸르른 하늘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난관을 극복하면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의미다.
갑진년이 값진 한해가 되게 하려면 말보다 실천, 행동이 우선돼야 한다.

그리고 이런 글도 쓴 적이 있다.

갑진년의 갑(甲)이 지닌 동쪽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시작을 상징하며, 청색은 푸르름으로 건강미 넘치게 새로이 시작하는 역동의 모습이다. 물론 새로 시작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지닐 수 있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해처럼 희망을 품고 시작할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질서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 계묘년이기 때문에 갑진년에 변화를 두려워하고 기존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만 집착하면 향후 10년의 미래에 뒤처질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진(辰)은 오행으로 '토'에 해당하며 천간 목(木, 나무)의 기운인 갑(甲) 목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지지기반이 되기도 하고, 감(甲) 목(木) 입장에서는 진(辰) 토(土)를 경작하는 '소토(燒土)'의 의미도 지닌다. '소토'란 경작의 의미로 새로운 농사를 짓기 위해 불을 지르고 밭을 갈아엎는 것이다. 즉 유행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기반을 만들고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면에서 새롭게 시작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농사를 망칠 수 있다는 의미다. 새로운 10년의 시작을 꿈꾸어 보는 것이 2024년 갑진년 푸른 청룡의 해다. 더불어 지난 것들을 털어버리고 소토하여 밭을 새롭게 갈아엎는 수고를 필요로 한다. 그런 해를 우리 맞이하여 지내왔고, 이젠 얼마 남지 안 했다.

오늘 일이 뜻대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희망한다. 여러분들도 희망하시기 바란다. Spero~~, spera~~!

어쩌면/댄 조지 족장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데려갈 것이다.
어쩌면 꽃들이 아름다움으로 너의 가슴을 채울지 모른다.
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 영원히 닦아 없애 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사람은 빵보다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희망을 갖자. 'Dum vita est, spes est(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라는 라틴어 문장을 나는 좋아한다. 이 말은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건배사로 내가 자주 쓰는 것이 "스페로(spero), 스페라(spera)"이다. 이 말은 "나는 희망한다. 그러니 너도 희망하라"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나는 숨쉬는 동안 희망한다'는 라틴어 'Dum spiro, spero(둠 스피로, 스페라)'에서 나온 말이다. "불행과 고난을 버티게 하는 힘은 실낱 같은 희망이다. 지금은 돈이 없어도, 집이 없어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해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지금보다 나아지리 란 희망이 있을 때 사람은 초인적인 성실성과 인내심을 발휘한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절망의 순간을 살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 책은 철학이나 문학 또는 역사 등 인문 사회 과학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건축 등 모든 예술 분야의 기술 과학 의학 등까지도 아우른다.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를 희망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꿰뚫는 사상서이다. 그는 희망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의하였다.
▪ 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희망을 먹고 산다.
▪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 희망이 힘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삶을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극복하게 된다.
▪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 희망은 인간 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해 준다. 코로나로 모두 괴로워한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 보다 더 한 것들로부터 이겨낸 경험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사람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은 세월이지만 비애에 침윤되지 않고 듬쑥하게(사람 됨이 가볍지 아니하고 속이 깊다) 자기 삶을 살아내도록 힘을 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희망을 키워준다. 이때 희망은 스스로 빚는 것이다. 세상에 희망이 있냐고 음울한 목소리로 묻는 이들이 있다. 욕망의 문법에 따라 도태되지 않으려고 질주하다 보니 숨은 가빠지고, 어느 순간 외로움과 상실감에 확고히 사로잡혔지만, 그렇다고 하여 멈추어 설 수도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일종의 비명이 희망이다. 희망을 자기 외부 어딘 가에서 찾으려는 이들은 낙심할 수밖에 없다. 희망은 스스로 빚는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영복 교수는 자신의 책,  <<담론>>에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처하는 경우 십중팔구 불행하게 된다. 제 한 몸만 불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에 빠뜨리고 일을 그르친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 ‘70%의 자리’를 권하였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그릇 론'이라 한다. “30 정도의 여유, 30 정도의 여백이 창조의 공간이 된다.” 반대로 70 정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100의 능력을 요구 받는 자리에 가면 어떻게 될까?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의 불량품으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난다.” 또한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자리와 관련해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주역>>은 효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경우를 ‘득위’라 하고, 잘못된 자리에 가 있는 경우를 ‘실위’라고 한다. '득위'는 아름답지만 '실위'는 위태롭다. <<주역>>의 핵심은 관계론이다. '길흉화복'의 근원은 잘못된 자리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내가 있는 '자리', 즉 '난 누구, 여긴 어디'를 묵상하며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직위(職位)'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 속에서 나의 위치까지 확장되는 용어이다. 한문으로 하면 '위(位)'이다. <<주역>>에 따르면, 제자리를 찾는 것을 '득위(得位)', 그렇지 못한 것을 '실위(失位)'라 했다. '득위'는 만사형통이지만, '실위'는 만사 불행의 근원이다. 잘못된 자리는 본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한다.

인생은 모두 타이밍이다. Life is all about timing. 우리 삶의 모든 게 적당한 때가 있으며,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성실도, 창의성도 지식도 인내가 동반되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어떤 일을 도모할 때도 동반되는 긴장과 두려움도 인내로써 극복이 가능하고, 수시로 발생하는 돌발 상황도 인내를 통한 합리적 시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가 있다. 사이클은 이렇다. 인내한다. 그러기 위해 우선 자기 믿음을 키우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 여기서 희망은 가능성이다. 희망은 언제나 믿는 자의 것이다. 믿는 자만이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진다. 승리는 언제나 목숨을 건 자의 것이다. 여기에 다 인내를 요구한다.

희망을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정의하고, 희망에서 오는 '가능성'을 보태면, 내 삶이 더 희망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희망은 희망적이어야 한다' 정의가 정의로워야 하고, 사랑이 사랑스러워야 하고, 문화가 문화적이어야 하는 것처럼. "가장 마지막에 죽는 것이 희망이다"라는 독일어 문장이 있다. 키에로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희망의 손을 뿌리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죽는다. 많은 화두를 얻었다. 언젠가 나는 희망을 '가능성'이라고 보기보다, '절망하지 않기'로 받아들였던 적도 있다.

어쨌든 인내심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순간을 성실하게 견딜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 믿음과 지금은 힘들지만 미래에는 더 나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다. 인내하면, 포기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희망한다. "이것이 희망입니다." 언젠가 적어 두었던 것이다. 누가 쓴 건지는 잘 모른다. 언젠가 단체 카톡에서 얻은 거다. 오늘 아침 사진은 대전 MBC 장래균 PD 집에서 찍은 거다. 여기서 희망을 보았다.

이것이 희망 입니다

내 손에 펜이 한 자루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펜으로 글을 쓸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고
편지도 쓸 수 있으니까요.  

내 입에 따뜻한 말 한마디 담겨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말로 남을 위로 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고
기쁘게 할 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겨져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발로 집으로 갈 수 있고
일터로 갈 수 있고
여행도 떠날 수 있으니까요.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눈물로 가난과 슬픔으로 지친 이들의
아픔을 씻어 낼 수 있으니까요.  

내 귀에 작은 소리 들려온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말과
아름다운 음악과
자연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내 코가 향기를 맡는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은은한 꽃 향기와
군침도는 음식 냄새와
사랑하는 이의 체취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내 곁에 좋은 친구 한 사람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친구에게 내 마음 털어 놓을 수 있고
지칠 때는 기댈 수 있고
따뜻한 위로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내 가슴에 사랑 하나 있다면
그것은 희망 입니다.
마음 가득 사랑이 있다면
기쁨과 행복한 세상 일테니까요.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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