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아침에 공유했던 시입니다.
1191.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는 2020년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죽은 첫 번째 환자 이야기를 듣고 슬펐다. 그는, 모든 끈이 끊어진 채, 사방이 막혀 있고 창문마저 절망으로 덮여 있는 폐쇄병동에서 20년을 갇혀 지냈다고 한다. 그에게는 연고자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죽은 뒤 에야, 42Kg의 삐쩍 마른 몸으로 그 폐쇄병동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고병권의 묵묵(경향신문, 2020년 3월 1일자)>에서 읽었다.
고병권은 "무려 20년 전부터 철저한 격리 상태에 있던 장애인들이 왜 바이러스의 첫 번째 희생자들이 되었을까"라고 질문하고, 그 답을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이들이 바이러스로부터 격리되었던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로서 격리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못 쓰게 된 물건처럼 눈에 뜨지 않는 어딘 가에 치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아프다. 이번 바이러스 사태로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곳에 '새로운 빛'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방치된 사람들이었으니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도 이상할 게 없다. 난 처음에 청도의 대* 병원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 정신병동에는 세상과의 끈이 끊어진 채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곳이었 다니, 몰랐던 내가 부끄럽다.
나는, 고병권처럼,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프리랜서로 특강이 없으면 대체적으로 집에서 혼자 지낸다. 아니면 혼자 카페나 코-워킹 공간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특히 상처(喪妻)를 하고 딸과 함께 살지만, 식사 시간을 빼고는 거의 혼자 놀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난 TV를 거의 안 본다. 그러나 저녁에는 나의 복합와인문공간 <뱅샾62>가 있어 외롭지 않다.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동안 나는 자초(自招)하여, 고독한 삶을 살았던 터라 일상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건 내가 살던 일상이 아니었다. 평소와 달리, 내 일상이 답답했다. 세상으로부터 내가 고립된 느낌이다.
'자초(自招)'에서 초(招) 자가 '초대하다, 부르다'는 말이다. 프랑스어로는 '엥비떼(inviter)'라고 한다. 유학 시절 프랑스 친구들과 "같이 밥 먹자(On mange ensemble)"하면, 밥값을 1/N로 계산한다. 그러나 "내가 널 초대할 께(Je t'invite)"하면, 내가 밥 값을 낸다는 말이다. 그래 난 inviter(초대하다)란 단어를 좋아한다. 그래 나는 '자초한 고독', '자초한 불편' 등 이런 말도 좋아한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원되는 것일 혐오한다. 그래 나는 내가 가기 싫은 곳은 안 간다. 사실 우리는 고독과 외로움을 구별한다.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슬픔이지만, 고독은 함께 있어도 느낄 수 있는 '혼자 있음'의 자각이다. '자초하여 혼자였을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라는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런데 감염을 막기 위해 서로에게 멀어지라는 정부의 지침이 내려진 이후 나는 자초하여 혼자 지내는 삶과 격리된
삶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거리에 사람들이 줄어들었지만, 그나마도 얼굴 없는 KF94들 뿐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멀리서 부터 미묘하게 간격을 유지한 채 걷거나 피했다. 식당에서도 멀리 떨어져 앉거나, 손님이 없어 식당이 텅텅 빈 공간들 뿐이었다. 이유없이 답답하고 우울한 상태로 몇 일을 보내고 있다. 우리 <뱅샾62>도 한가하다. 그러니까 혼자 지낼 수는 있지만 격리된 채 살기는 불행한 일이다.
행복의 조건은 상황마다 다르다. 그리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도 없다. 다만 사람들은 부나 명성보다는 주변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로버트 월딩어 미 하버드대 교수가 약 75년간 724명을 추적 조사한 결과, "돈, 성공 그리고 명예보다는 가족, 지인 그리고 집단 내에서 고립을 느끼지 않으면서 양질의 관계가 유지될 때, 사람들은 가장 행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런 좋은 관계는 차이를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이번 코로나19 사건이 생기고, 해결 방식에 대한 생각 차로 계속 갈등이 생기고 있다. 그럴 때마다 한 번쯤 상대 입장에서 사안을 보고 나와 다른 생각을 일정 부분 인정하면 어떨까?
이 강요 받은 휴식동안, 나는 나를 고독(孤獨)하게 만들어 나의 고유임무가 무엇인지 조용하게 점검하는 시간으로 만들 생각이다. 휴식(休息)이란 말의 한자처럼, 나는, 나무처럼 나의 뿌리를 아무도 볼 수 없는 저 깊은 곳에 숨기고,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얼른 사태가 마무리 되고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 사는 곳에서는 잠시 떨어져 지낼 수 있고 얼마든지 혼자 사는 것도 가능하다. 언제든 연락하고 연락을 받을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일시적으로 혼자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강요된 격리 속에서 고립된 사람은 살기 힘들고 불행하다. 고병권의 말처럼,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좋은 글처럼, 너가 없다면, 내 차가, 내 집이, 내가 가진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제목과 작자 모름/출처: 작은별(littestar94)의 블로그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차를 모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태워 주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느냐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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