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6.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3월 4일
"최고의 하루를 사는 거다." 그게 행복이다.
행복이란 맛있는 거 먹고, 일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는 것과 관련된 것들을 많이 생각하지만 이와 같은 소소한 행복도 삶에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 있을 때만 약속한 행복을 겨다 준다. 우리가 흔히 소확행(사소한 것에 확실한 행복)을 이야기 한다. 이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 말이다. 일상의 작은 일들이 주는 행복이 그가 누리는 행복의 전부가 아니다. 큰 행복에 빠져 있다가 작은 행복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작은 행복을 연료로 큰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소소하고 작은 행복이 그의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잘한 행복이 전부인 줄 알면 하루키에게 속은 것이다. 소확행이 전부인 젊은이는 자기의 포부나 꿈이 없이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나 먹으며 얻는 심리적 만족감이 행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 했지만 이게 오눌 아침의 화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유데모니아(eudaimonia)라 불렀다. 이 말은 자신을 존재의 수준에서 차별화 시키는 삶의 목적을 각성하고, 이 목적을 현재 자신의 삶과 일로 가져와서 실현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또한 현재 자신의 삶에서 그 목적이 조금씩 실현되어 자신이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결과적으로 <번성>하는 체험을 의미한다. 번성과 성숙은 고사하고 우리 삶이 지속적으로 쪼그라드는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런 본질적인 행복과 차별되는 순간적 쾌락을 가져다 주는 소확행의 행복을 아리스코텔레스는 '헤도니아(hedonia)'라 한다.
최진석 교수가 명쾌하게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은 행복 속에 큰 우주가 담겨져 있다고 느낄 정도로 만족을 한 거다. 그런데 자잘한 행복이 본인의 전부인줄 알고 소확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를 본인의 포부로 살겠다는 꿈은 없고 그냥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나 받아먹으면서 심리적 만족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살겠다는 나약한 태도라고 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은 행복 속에서 큰 우주를 느꼈다면, 우리 주변에는 작은 행복이 전부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진정한 나;로서 큰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꿈 없이 작은 행복에 그친다는 것이다. 큰 생각 없이 작은 행복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작은 행복과 큰 생각을 연결하는 힘'이다. 여기서 큰 생각은 진정 나 자신이 되는 길이라 본다. factvirus.co.kr에서 만난 다음 8가지가 잘 정리된 방법이라 보고 공유한다.
(1) 나는 누구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을 통한 자각이 필요하다.
(2) 임시 치아 카벙클(carbuncle)이 전부가 아니다.
(3) 심연에서의 수련으로 단련하여야 한다.
(4) 있는 그대로 나를 응시하기를 나만 것을 알아가야 한다.
(5) 모호한 상태를 외면하지 않고 상황을 수용하며 나아가야 한다,
(6) 불편하게 살아야 예민해 진다.
(7) 지금 이상을 욕망하는 심리적 준비가 있어야 한다.
(8) 독서와 운동 중 더 중요한 것이 운동이다.
우리는 어떤 방법들을 나열하면, 그걸 꼼꼼하게 읽으며,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대충 넘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벌레가 '대충'이라 한다. 다 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래되고 안주하는 나 자신을 깨어 있고 예민하게 하는 기회를 잃고 만다. 그냥 지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감각적 받아들이고 넘어간다. "뻔한" 이야기라고 자신의 일상에 한 가지라도 적용해 보려 하지 않는다.
생각들이 낳은 한 주이다. 기다리는 게 너무 많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쨌든 오늘도 최고의 하루를 살 테다. 어제 밤에 다시 한 번 "화이불창(和而不唱)"을 다짐했다. <장자>의 '덕충부' 4절에 나오는 말이다. '남에게 동조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라이프 스타일은 '나'라는 자의식에서 완전히 풀려난 상태로, 마치 물 같은 상태를 말한다. 둥근 그릇에 들어가면 둥글어지고 길쭉한 그릇에 들어가면 길쭉해 지고, 추우면 얼고, 더우면 증발한다. 이것은 완전히 빈 배가 된 상태,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가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좀 편하게 살고 싶은 데, 인문운동가란 운명을 그러질 못한다. 오늘 아침 시처럼,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고 싶다. 오늘 아침 사진은 동네 공원에 핀 산수유 꽃이다. 가까이 가보면, 예쁘지 않다. 이 꽃은 멀리서 보아야 예쁘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정일근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 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 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등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네가 울며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화이불창"의 모습을 보이는 <장자>의 애태타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공유한다. 다시 '나 자신이 되는 길' 이야기를 이어간다.
(1) 사람은 질문할 때만 자기 자신이자 독립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질문(質問)은 한 지점에서 다음 지점으로 건너가기 위한 경계를 훌륭하게 통과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다. 질문은 그 문(問, 물음)을 통해 변화무쌍한 미래로 진입하기 위한 자신만의 무기이다. 칼 포퍼에 의하면,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라 했다. 문제해결을 위한 문제들은 답을 요구한다. 답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찾나? 그 답을 찾으려면 질문을 해야 한다. 질문이 없으면 답이 없고, 질문이 잘못되어도 답이 없다. 게다가 잘 보이지 않던 답도 질문을 바꾸면 길이 보이고, 같은 듯 보이는 문제도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따라 다른 답에 이른다.
새로운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은 그에 적당한 해답을 찾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질문은 달라진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스스로에게 습관적으로 묻는 훈련이다. 만일 우리가 '오늘'이라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시간과 그 시간이 빚어낸 공간 안에서 자신이 완수해야 할 임무를 스스로 묻기를 주저한다면, 우리는 오늘을 헛되이 보낼 공산(公算)이 크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의 목적은 해답에 있지 않고 질문 자체에서 발견된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답하는 것이지만 질문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금방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묻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전한 내가 되면 궁금증과 호기심을 기반으로 세상에 개방적인 사람이 된다.
(2) 임시 치아, 카벙클(carbuncle)이 전부가 아니다. 언젠가 다음 사진을 보고, 놀라고 많은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이 새끼 거북이들은 어미 거북이가 알을 낳고 덮어놓은 30cm 두께의 모래를 뚫고 나온다, 약 3일에서 7일의 시간이 걸린다. 이때 새끼 거북이의 몸무게는 알을 깨고 나왔을 때에 비해 약 30퍼센트 정도 준다. 이렇게 떠난 거북이들이 되살아나올 확률은 0,1%란다. 1000마리 중 한 마리라고 한다.
바다의 파도가 가장 높은 날, 그리고 여름 중 가장 뜨거운 날, 어미 거북이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거칠고 드높은 파도를 가르며 23,000km를 헤엄쳐 자신이 태어난 해안으로 돌아온다. 5주에서 6주 전 몸 속에 품기 시작한 알을 낳기 위해서이다. 해안에 도착한 어미 거북이는 미세한 기척도 없는 한밤중에 수십 미터 떨어진 후미진 모래사장에 둥지를 튼다. 이곳은 바닷물이 닿지 않아 알들을 위한 둥지로 안성맞춤이다. 알이 안주할 만큼의 공간이 마련되면 어미 거북이는 50에서 200개의 알을 낳는다. 알을 낳은 뒤엔 곧바로 모래로 둥지를 덮어 놓는다. 세 시간 동안 이 모든 과정을 마친 어미 거북이는 미련 없이 바다를 향해 떠나간다.
2개월쯤 지나면 모래 속에 있던 알들이 깨지기 시작한다. 새끼 거북이는 알 속에서도 생존을 위한 무기를 스스로 만들어 낸다. '카벙클(carbuncle)'이라고 불리는 '임시 치아'가 그것이다. 새끼 거북이는 '카벙클'로 알의 내벽을 깨기 시작한다. 새끼는 무작정 알 안에 안주하고 있다가는 금방 썩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내가 안주하고 있는 환경이 나의 멋진 미래와 자유를 억제한다면, 자신만의 카벙클을 만들어 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제는 알을 깨고 나왔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단한 알을 깨느라 카벙클이 온통 부서지고 피가 난 새끼 거북이를 맞이 하는 것은 어미 거북이가 알을 낳고 덮어놓은 30cm 두께의 모래이다. 새끼 거북이들이 이 견고한 모래성을 뚫고 나오는 데는 자그마치 3일에서 7일의 시간이 걸린다. 이때 새끼 거북이의 몸무게는 알을 깨고 나왔을 때에 비해 약 30퍼센트 정도 준다고 한다.
그런 후, 새끼 거북이들은 숨을 죽인 채, 때를 기다렸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운명의 질주를 시작한다. 바다라는 새로운 생명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오늘의 사진이 그거다. 경이 그 자체이다. 그러나 바다는 이들에게 천국인 동시에 지옥이다. 새끼 거북이들은 바다로 뛰어든 뒤 48시간 동안 미친 듯이 수영을 한다. 그들이 향해 가는 곳은 바다의 가장 밑바닥이다. 이곳은 수압이 높아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등딱지와 배 딱지를 단단하게 만드는 수련의 장소이다.
그리고 바다 거북이는 그 심연에서 1년을 홀로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비로소 바다 거북이로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이 '실종의 기간' 1년이 지나면, 떠다니는 미역에 몸을 실어 영양을 보충한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면 짝짓기를 한다. 그리고 새끼거북이가 어른 거북이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 확률은 0,1퍼센트란다. 1,000마리 중 한 마리만 생존한다.
알의 내면을 깨지 못한다면 새끼 거북이는 자신을 억누르고 규정하며 정의하는 환경을 세상의 전부라 여긴 채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세상의 전부라 여긴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견과 상식, 전통과 관습, 흉내와 부러움이라는 알을 깨고 더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다. 나를 보호해주고 감싸주었던 알이 나를 감금한 채 죽게 하는 무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역시 주어진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신만의 카벙클을 만들어야 한다. 알을 깨지 못하면 좁은 세상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카벙클은 나의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도구일 뿐이다.
(3) 심연에서의 수련으로 단련하여야 한다. 어린 거북이가 바다에 도착하면 가장 아래 심연에 도착해 1년간 수련을 한다. 위협하는 뭉고기가 많지 않고 수압이 높아 등닥지와 배따지를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곳이다. 바다 거북이에게 생후 1년은 실종 기간이나 다름 없다. 혼자 힘으로 살아남아야 진정한 바다 거북이로 살아 갈 수 있다. 생존을 위한 수많은 선택과 깊은 단련이 필요하다.
몇일 전에 읽은 <이솝 우화>(현대지성) 125번의 제목이 "제우스와 거북이'이다. "제우스가 결혼하는 날 자기 혼인 잔치에 모든 동물을 초대했다. 그런데 거북이만 오지 않았다. 제우스는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어 몹시 황당해 하며, 다음날 혼인 잔치에 오지 않은 이유를 거북이에게 물었다. 거북이가 대답했다. "집이 좋아서요. 집이 최고잖아요." 그 말에 격노한 제우스는 그 후로 거북이가 자기 집을 등에 늘 짊어지고 다니게 했다." 우화이다. 우화의 특징은 이야기를 또 생산해 낸다는 것이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길에 대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이번 일요일로 넘긴다. 글이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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