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4월 8일)
어제는 미사 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walk to Emmaus )이란 행사를 했다. 그리고 뱅샾에 와서 대단한 식사를 했다. 자연산 회와 화이트 와인으로 친목을 다졌다.
엠마오 출신 두 제자는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를 보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길가에서 ‘낯선 자’를 만나,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다. 그 낯선 자가 예수였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과 시간에서만 '신'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이런 ‘낯선 자’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고 ‘지극히 작은 자’를 피한다. 낯선 자 중 ‘지극히 작은 자’는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생명들이다. 이들은 내 안에 존재하는 ‘자비’를 일깨우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짊어진 생명들이다. 내가 그들의 고통(passion)에 공감하여 내 안에 숨겨진 자비(compassion)를 일깨우면, 그 ‘지극히 보 잘 것 없는 대상’이 예수가 된다. 그리스도 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생존한 이유는 이 단순하지만 감동적이며 강력한 명제 때문이다.
예수가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가 된 것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원칙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원칙은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 타인과 주변, 특히 옆에 있는 나그네의 처치를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인식하게 된 유일한 통로는 '낯선 자'를 인식하고 그에게 비정상적인 만큼의 호의를 베푼 것이다. 예수는 '낯선 자'이다. '낯선 자'에게 행동으로 긍휼을 보여줄 때, 신의 신비가 우리 눈 앞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때 예수가 사라진 것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이 낯선 자가 '진짜' 예수라고 사칭하면서 종교 장사를 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예수가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거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를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로 예수를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 예수라 부른다. '신'의 특징은 '낯섦'과 '다름'이다.
우리는 세상의 걱정과 유혹이 너무 강해서 눈이 멀고 뜨거움이 식고 말았다. 예수에 대한 뜨거운 체험을 회복하여야 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파편적이고 편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이 종교이다. 나와 다른 이데올로기와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신'은 비로소 우리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다. 나는 나 답게 살고 싶다. 그건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원래 까마귀는 까마귀 답게 점잖고 당당하게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 까마귀가 비둘기처럼 거들먹거려보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날로 이 가엾은 까마귀는 제 걸음걸이를 전부 까먹어버렸다지 뭡니까? 뒤죽박죽이 된 거예요."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온다.
그럼 나 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재형이 자신의 책 <<발가벗은 힘>> 에서 잘 정리를 했다. 그의 경우에는 '용기', '혼자 있는 힘'. '고집', '나만의 개똥 철학', '파워', '발가벗은 힘' 등을 들었다. 나는, 거기에다 '자신의 심연을 만나는 고독한 시간' ''고집'보다는 '유연함'', '당한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 한 생각', '원칙' 그리고 '꾸준함'을 더하고 싶다.
나는 내가 나의 호를 목계(木鷄, 나무로 만든 닭)라 졌다. '목계'처럼 완전한 마음의 평화와 균형을 지닌 사람이 되고 싶다. 완전한 평정심을 이룬 모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어깨의 힘을 빼는 것이다. 최고의 싸움 닭은 뽐내지 않는다. I am who I am이다. 나는 나일 뿐이다. 평상심으로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교만, 조급함, 공격적인 태도의 사나움 대신,
- 세속과 하나가 되기도 하고(노자가 말하는 "화광동진 和光同塵", 자신의 광채를 누그러뜨리고 이 풍진 세상의 눈높이와 함께 한다),
- 움직이지 않기가 태산처럼 원칙을 지키며(조급함을 버린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부동여산(不動如山)"의 여유),
- 부드러운 감성을 지닌 사람이(노자가 말하는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부드러움과 유약함이 결국 강하고 센 것을 이긴다)이 되고 싶다.
그래 "나무처럼 살기"로 했다.
나무처럼 살기/이경숙
욕심부리지 않기
화내지 않기
혼자 가슴으로 울기
풀들에게 새들에게
칭찬해 주기
안아 주기
성난 바람에게
가만가만 속삭이고
이야기 들어주기
구름에게 기차에게
손 흔들기
하늘 자주 보기
손뼉치고 웃기
크게 감사하기
미워하지 않기
혼자 우물처럼 깊이 생각하기
눈감고 조용히 기도하기
우리는, 정신차리지 않고 방심하면, 자신의 과거에 축적된 세계관이란 렌즈로 주위를 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가치를 나름대로 측정한다. 자신의 시선을 객관적이며 온전한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의 인식체계의 노예가 되어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다. 특히 우리는 세상을 쉽게 둘로 나눈다. 왜냐하면, 그런 구분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늘 변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투스가 한 말이 지금도 혜안을 준다. 그가 한 말이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빠질 수 없다. 잘 알려진 라틴어 문장이다. Panta chorei ouden menei. 모든 것은 변하고 그대로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영어로 말하면 이렇다. Everything changs, and nothing remains still. 만물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한다. 생로병사의 수레바퀴 안에서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며 변한다.
그러나 서양 철학과 종교는 이상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였다. 그러한 구분은 우리가 사유하는데 편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우리의 생각을 혼탁하게 만들어왔다. 나는 이 두 세계를 품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 한문 명(明)자를 가지고 늘 깨어 있으려고 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밝을 ‘명(明)'자이다. ‘밝다'의 반대는 ‘어둡다'이다. 명자를 풀이하면, 해(日)와 달(月)이 공존하는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안다'고 하며, 그 때 사용하는 한자어가 '지(知)'이다. 안다고 하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평생을 안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외치다 죽은 이유를 난 알겠다. '명'자는 그런 기준을 세우고, 구획되고 구분된 ‘앎(知, 지)’를 뛰어 넘어, 두 개의 대립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명확하지 않은 경계에 서거나 머무는 일이다.
명(明)자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어가 다이몬(daimon)이다. 다이몬은 악마이면서 동시에 천사이다. 다시 말하면, 다이몬은 악마와 천사의 경계 위에서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다이몬이 품고 있는 의미가 다양하다. '천사, 악마, 천재성, 신 그리고 운명'의 뜻을 담고 있다. 다이몬은 신적인 존재로, 자신을 수련하여 신적인 삶을 살려는 자를 심판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단테는 자신의 심연 속에서 깨어난 이것을 ‘스피리토 아모로소( spirito amoroso), 즉 ‘사랑이라는 영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괴테가 발견했다는 ‘다이몬(daimon, 자신을 자신 답게 만드는 천재성)’이며,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하기 전에 들었다는 ‘내면의 소리(inner voice)'이며,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야가 들었다는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이며, 스티브 잡스를 미치게 만들었다는 ‘글자 사이의 공간(space between letter combinations)'이다.
이 다이몬은 수련자가 완벽한 자가 되도록 수련 시키는 '도움이'이다. 다이몬은 인간에게 혹독한 심판을 통해, 인간 각자가 지닌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도록 돕는다. 개개인이 지닌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이 '천재성'이다. 천재는 자신이 즐거워하고, 몰입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은 자이다. 자신만의 구별된 한 가지를 매일 매일 완벽하게 갈고 다는 사람이다. 천재는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더 나은 자신을 상상하고 숭고한 자신과 경쟁하는 자이다. 다이몬은 나를 억세게 밀어붙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길 요구한다. 다이몬은 나의 운명을 재단하여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도록 도와주는 사범이다.
인생은 나의 선택을 기다리는 기회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개성과 천재성을 훈련시킬 다이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생이란 자신의 임무인 다이몬, 즉 천재성을 찾는 여정이다. 나는 그 다이몬이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신적인 어떤 특질이라면, 나는 이 단어를 인간을 한껏 고양시키는 인간 심성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신성'(神聖)이라고 번역하고 싶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명언 "에토스 안스로포 다이몬"을 다시 번역하자면 "한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이 인생을 통해 수련한 결과로 도달한 신성 혹은 카리스마다"다. 인격이란 인간 각자가 지니고 있는 그 사람만의 신성성을 발현하는 수련이다. 이러한 길에서 우리는 우왕좌왕하고, 좌절한다. 최 진석교수는 "방황하는 길 위에서 "너는 누구냐?'라는 환청에 시달린다면, 오히려 괴로워"하지 마라고 했다. 오히려 그건 병이 아니라, "신이 되어 가는 고단한 여정에 자기 스스로 내리는 축복의 종소리"라고 했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인문운동가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나무처럼_살기 #엠마오_가는_길 #낯선_자 #다이몬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문학이란 '자유를 위한 기술을 익히는 학문'이다. (0) | 2025.04.09 |
---|---|
나를 채우는 힘 (3) (2) | 2025.04.08 |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 (2) | 2025.04.08 |
장자는 "마음의 재계(心齋)"를 강조한다. (2) | 2025.04.08 |
소국과민(小國寡民): 나라를 적게 하고 주민의 수를 적게 한다. (0) | 2025.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