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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4월 7일)

다음은 내가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부터 늘 주장하는 거다. "우리는 사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한다." 알베르 카뮈가 말하였습니다. 나는 프랑스 유학하면서 그 사회로부터 이 의식을 배웠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좌파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서 폭넓게 동의를 얻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렇게 다시 고쳐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정의가 질서보다 더 중요한 가치이다."

우리 사회는 사회질서가 사회정의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초 질서를 지키자!"는 구호로 학교 에서 교육받으며, '안보 이념'을 정의나 자유, 평등의 가치보다 더 강조받고 있습니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 질서와 안보 이데올로기를 계속 주입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분단 상황을 이용한 지배세력에 의해 주입되어 사회구성원들한테서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그만큼 강력하게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사회정의의 요구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정의보다 질서를 강조하는 이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변화는 없습니다. 사회변화를 두려워하면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약자가 수구보수세력들에 투표하는 것도 이 두려움의 표시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사회정의가 사회질서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말입니다. '질서에 대한 무의식의 복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안정을 추구하는 본능적 경향이 있지요. 우리 인간은 무질서와 혼란은 불안과 긴장을 불러오기 때문에 은연중에 안정 상태, 아니 중지 상태로 되돌아가기를 바라지요. 지배세력이 질서를 강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불의와 차별, 배제가 이루어지고, 억울함과 굴종을 강요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회정의를 계속 요구하여야 합니다.

유시민이 오늘 법정에서 했다는 최후진술의 일부이다. "라인홀드 니부어라는 20세기 미국 신학자가 한 말입니다. “개인을 중심에 두고 볼 때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고, 국가를 중심에 두고 볼 때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식이었는데, 앞으로는 더 할 거 같다. "법원이 무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중 일입니다. 조사를 받으러 검찰 청사에 들어서고, 기소되어 법정에 서는 과정에서, 저는 언론의 먹잇감이 되어 재판도 받기 전에 파렴치한 범죄자로 낙인 찍혔을 것입니다. 언론과 검찰이 손을 잡으면 아무도 제어하지 못하는 무서운 권력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술을 마친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한동훈 검사는 채널A 이동재 기자가 저를 해치는 데 필요한 진술을 받을 목적으로 이철 씨를 협박 회유하려는 계획을 알면서도 묵인 방조했습니다. 그래서 이동재 기자와 공범일 수 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관련 증거가 들어 있음이 확실해 보이는 한동훈 검사의 휴대전화를 아직도 열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서 스스로 밝힌 것처럼 소환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를 명예훼손죄로 형사 처벌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이 한동훈과 유시민 사이에 정의를 세우는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검사님, 진심 그렇게 믿으면서 저를 기소하신 것은 아니라 믿습니다." 한동훈 입맛에 맞춰 징역 1년을 구형하는 검찰, 권력자 눈치를 살펴 보란듯 입학취소하는 대학들, 거기에 올라타는 부역자들. 이런 것들에 분개하는 이유는 불공정하고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공부하고 저항해야 한다. 우선 정치란 무엇인가?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공정인가? 모든 시민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다음은 전진성 부산교육대 교수의 주장이다.
1. "어차피 모든 게 제 밥그릇 챙기는 수단일 뿐이니, 그냥 각자 능력대로 사는 ‘공정한’ 사회를 원한다면, 그런 생각은 냉철한 현실주의라기보다는 정치적 허무주의에 가깝다. 잘난 사람은 잘살고, 못난 사람은 못사는 게 ‘공정’이라면 대체 정치의 역할은 무엇인가? 못난 사람이 잘 살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인가? 만약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경찰력이나 법정일 것이다. 못난이들의 아우성을 공권력으로 차단해야 될 테니 말이다."
2. ‘공화주의’는 공화국의 ‘시민’이 ‘공민’이다. 복종만 하는 국민이 아니다. 공동체의 시민이다. 공화국의 "시민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가운데 개인의 발전과 자유도 떳떳하게 구가할 수 있어야 한다. 공화국의 시민은 조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침략자에 맞서 함께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전우이자 공동체의 앞날을 위협하는 사회적 불의에 함께 저항하는 민주 동지이어야 한다."
3. "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일말의 자발적인 헌신도 없고 서로의 헌신성을 믿지 못한 채 각자가 이해득실만을 따지는 공동체라면,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체제 유지가 필요하다면, 과연 주주총회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4. 우리의 자칭 진보세력도 공화주의를 모른다. 소위 ‘진보’ 세력은 어차피 공화국 따위는 안중에 없는 듯하다. 공화국이란 그저 기존 체제를 유지시켜주는 정치적, 법률적 장치일 뿐이다. 공화주의가 말하는 "‘정의’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고 죄를 범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응당한 처벌을 받으며 능력이 없어도 사람 대접받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상식이 지켜지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들의 숭고한 이념이 온전히 실현되는 상태를 말한다. 노동해방, 여성해방, 탄소중립이 실현되지 않는 한, 유전무죄의 사회이거나 말거나 어차피 오십보백보이다. 완벽한 세상이 아니라면 어차피 요지경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 ‘숭고한 이념의 실현’은 이념이 아예 제거된 ‘만인 대 만인의 투쟁’과 기묘한 짝을 이루고 있다.

자꾸 이런 류의 글을 인문 일기 쓰는 이유는 이런 것들을 외면하면 다음은 내 차례가 될 거이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사진이 너무 화려해서 더 슬프다.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마르틴 뇌묄러(20세기 중반의 독일 신학자)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을 숙청했다.
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카톨릭 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 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젠 글을 두 가지 버전으로 쓰다. 길게 사유한 글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면 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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