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월 10일)
1.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 중요하다. 그 이유를 보여 준 이가 박정훈 대령이다. 의인 한 사람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반면 윤은 악한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정말 많은 것을 망칠 수 있다. 악행은 아무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행은 다르다. 이게 내 평소의 생각이다. 버나드 쇼의 말이다. "선행이란 악행을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2.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하인리히의 재판을 보면서 놀란 것은 악행 자체의 논리적 완결성(치밀하게 준비해 근면하게 학살했다는 점에서)에 비하면, 그 일을 행한 자의 정신적 수준은 너무나 천박하다는 점이었다. 하인리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때문에 그 일을 했다고 대답한다. 악행의 이유는 그렇게 짧거나 사실상 거의 없다. 악행은 정신적 수준이 저열하고 천박한 사람도 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악행의 이유를 모른다. 그러나 선행을 행하려면 수준이 높아야 만 한다. 세 살배기도 악행은 저지를 수 있지만, 선행을 하려면 좀 더 배워야 한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악행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천박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은 악이 선만큼이나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악은 선의 결여일 뿐이다.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바로 악행이다. 선을 행하는 건 힘들다. 하지만 악을 행하는 논리는 너무나 빈약하거나 없다. 악은 그저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들의 행위일 뿐이다.
3.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인향, 즉 사람의 향기는 선행(善行)에서 나온다. 선행이 무엇인가? 예언자 미가가 알려준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내가 만난 신이 요구한대로 생활하는 것이다."(<미가서> 6:8) 이를 요약하면, 정의 실천, 자비 추구 그리고 겸손 생활이다. 예언자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선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배철현 선생한테 배웠다. 선행에서 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브(tob)'인데, 이 말은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고, 냄새가 좋고, 맛이 좋고, 촉감이 좋은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향기와 맛처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토브'라는 선은 내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어떤 것이다. 그때 우리는 '인향만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좋은 매너, 선행에서 나오는 사람의 좋은 향기는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다. 좋고 나쁨의 기준의 기준에 절대적으로 상대방에게 달려 있다. 선행이란 나의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 향기로운가를 묻는 일이다. 그래 오늘 공유하는 시는 김행숙 시인의 <나는 무엇과 더불어 향기로워질까> 이다. 오늘 사진은 지인의 찻집, <꽃나래 허브>에서 찍은 것이다.
나는 무엇과 더불어 향기로워질까/김행숙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어우러질 때 아름답다.
잘 대비되는 우주의 빛으로
실내악을 연주하듯이
쓴 맛, 단맛이 어우러져
씹을수록 미묘해지는
살아가는 일은
때로는 곰삭아져서 향기로
익은 맛이도 되기도 한다.
배설물을 향수로 만든다는
향유 고래처럼
나는 무엇과 어루러져
향기로워질 것인가?
4.
오늘 아침의 화두에 따라, 이어서 "칠불통계게송"를 호출한다. '게송(偈頌)'이란 시의 형식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문장으로, 외기 쉽게 게구(偈句)로 되어 있다. 이 게구의 형식은 8음절을 하나의 구로 하여 2개의 구가 하나의 향을 이루고, 다시 2개의 행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32음절의 시이다. 게송을 잘 듣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 삶이 평안해 진다. "칠불통계게송"은 과거 일곱 부처님이 한결같이 당부한 훈계로, 곧 보편적이고 타당한 진리를 의미한다. 보통, 일곱 번째 부처인 석가모니 직전의 여섯 번 째 부처인 가섭 불의 게가 일반적이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자정기의 시제불교(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은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마음을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란 말이다. 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것은 일반적인 도덕이나,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 게송에서는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는 구절이 다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한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매 순간 마음을 맑히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 특히 술이나 마약 등을 절제하여야 한다. 술을 자주 마시면, 마음이 혼탁해 진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보고 있지 않은가? 특히 리더가 술을 많이 마시면 조직이나 국가는 망한다.
5.
중생들은 무명(無明), 아니 무지(無知)와 탐욕 또는 탐진치(貪瞋痴)의 삼독(三毒)에 의해 마음의 호수가 항상 흔들리고 혼탁 해져 제법(諸法)의 실상을 바르게 보지 못한다. 하지만 호수가 고요하고 깨끗해졌을 때, 그 호수에는 호숫가의 꽃이나 나무, 두둥실 떠가는 하늘의 흰구름까지도 그대로 비치듯, 마음이 고요해지고 청정 해졌을 때 일체만산의 참모습 또는 우주와 인생의 참다운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거다. 쉽게 말해, 마음 속의 번뇌(걱정 거리), 미혹(迷惑, 의심) 없는 마음 이라야 우주적 진리, 궁극적 실재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은 아집과 편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마음의 정화를 이루어 끝없이 열려 있는 사람만이 진리에 이르고, 그래야만 선을 행할 수 있다. 그러기 전에 우선 악을 행하지 않도록 힘을 쓰는 실천이 필요하다. 나는 마음의 바다에 풍랑이 치면,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에 나오는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미지를 기억하며 마음의 청정을 회복한다. '월인천강'은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비춘다'는 의미로, '부처의 자비가 달빛처럼 모든 중생에게 비춘다'는 거다. 그러나 나 자신의 마음의 호수를 잔잔하게 '월인천강'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나는 받아들인다.
6.
불교에서 말하는 칠불통계(七佛通戒)를 다시 소환한다. “악한 짓 하지 말고 선한 일을 두루 행해서 그 마음을 맑히라.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든 한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매순간 마음을 맑히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악행을 먼저 하지 말고, 선행을 하되, 그것이 끝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는 것은 깨달음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거다. 중국의 한 선사(도림)는 '칠불통계'에 대해 "세 살짜리도 아는 말이지만 팔십 먹은 늙은이도 실천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못 배워 서가 아니라 잘못 배워서 란다. 사람이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을 버젓이 행하는 것도 많이 배우지 못해서가 아니라 잘못 배워서란다. 역대 일곱 부처님들이 깨닫고 실천한 가르침의 핵심이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마음을 청정하게 가꾸라"이다. 이를 우리는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선을 말하기 전에 악을 짓지 말라'는 말을 먼저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선행을 많이 하지 못해서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이 힘들고 혼란스러운 것은 개인과 집단이 서로에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논어>>의 구절이 생각난다. 그리고 '칠불통계'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와 도림 사이의 일화도 전해진다. 백거이가 도림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라고 묻자 도림은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법구경>>은 말한다. "악행을 하면 누구나 나쁜 과보를 받고, 보시하고 선행하면 누구나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 나는 출생을 묻지 않는다. 다만 행위를 묻는다."
7.
<<장자>>의 "덕충부'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추남 애타타의 덕성을 설명하기 위해 공자가 한 말이다. "저는 언젠가 초나라에 사자로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돼지 새끼가 죽은 어미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얼마 후 돼지 새끼는 놀란 표정으로 모두 죽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것은 어미 돼지가 자기들을 봐 주지 않고,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미를 사랑하는 것은 그 외형이 아니고, 외형을 움직이고 있는 내부의 근본적인 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화이다. 천천히 잘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돼지 새끼들이 달아났다는 것을 보면, 진정한 사람 됨은 몸이 아니라 그 몸을 움직이는 무엇, 때묻지 않은 본연의 인간성이라는 것이다. 애타타는 비록 외모가 지극히 흉측하지만 그 본바탕에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늘이 준 본래의 재질, 본래의 바탕을 일러 재(才)라 하고, 이를 온전히 지키는 것을 '재전(才全)'이라 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인간 답게 하는 기본 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없는 사람은 삶이 아니고, 살아 있으나 죽은 삶과 같다는 것이다.
8.
맹자는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차마 몹쓸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그 요인을 꼽았다. 함닉(陷溺), 곡망(梏亡), 방실(放失)이 인간을 불선(不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함닉: 말 그대로 하면, ‘물속으로 빠져 들어 감'을 의미한다. 맹자는 “풍년이 든 해에는 자제들이 온순해지는 경향이 많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포악해지는 경향이 많다. 이것은 선천적으로 자질이 다른 것이 아니라, 함닉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 했다. 나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그 속으로 마음이 빠져들다 보니 성선(性善)의 기초가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위선자들이 거짓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현상이 그런 예일 것이다. 최근의 경우로 보면, 술 따위의 못된 일에 빠지는 것이다.
▪ 곡망: 선한 마음을 기르지 못하고 소멸된다는 말이다. 선행(善行)을 키우지 않는다. 맹자는 제나라에 있는 우산(牛山)을 들어 설명한다. “우산은 원래 수풀이 우거진 산이었다. 사람들이 땔감으로 쓰거나 목재로 사용하기 위해 도끼로 베니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또 사람들이 방목한 소와 양들이 나무 잎을 뜯어먹으니 저처럼 반질반질해진 것이다. 이걸 보고 원래부터 우산에 나무가 없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어찌 산의 본래 모습이겠는가.” 우산이 원래 아름다운 산이었던 것처럼 인간의 본바탕도 선한 상태였다. 그런데 죄인에게 형틀을 씌우듯 욕심이 선한 마음을 구속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 방실: 어리석음, 게으름과 같이 '놓아버린 마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방심(放心)과 같은 뜻 같다.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와 책임의 꾸준함이 없다. 말 그대로 마음에 방학을 주고 생각 없이 산다. 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인(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義)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지 않으니 슬프도다. 사람은 개나 닭이 집을 나가면 찾을 줄 알지만 마음을 놓아버리고는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없다. 바로 그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잃어버린 선한 마음을 되찾는 것이 학문의 길이라는 맹자의 울림이 크다. 양심을 잃은 지식인들이 자신을 다잡는 데 이만한 경책이 없을 듯싶다.
선한 본성을 갖고 태어난 것은 인간에게 축복이다. 나쁜 환경과 탐욕으로 인해 그 본성이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으로 변한 것은 재난이다. 선한 본성을 잃어버리고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은 재앙이다. 그런 재앙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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