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월 10일)
삶에서 불행한 일을 겪은 후, 그 불행 감정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는 사람들의 결론을 압축하면, '이번 생은 틀렸어.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라는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감정은 확증 편향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믿음과 일치하지 않은 정보는 무시한다. 또한 그 확증 편향이 진리인 양 마음을 닫아 건다.
세상을 지각하는 새로운 창문을 열어야 한다. 알아차림이 일어나는 의식의 구성 요소는 지각, 개념 그리고 의미이다. 그리고 의식은 이전의 기억이 있어야 한다. 이전의 기억 상태로 앎이 일어나는데, 그걸 우리는 의식이라 한다. 기억이 없으면 의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 그 기억을 위해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의미를 찾으려면 지각과 개념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지각은 실재를 보지 않는다. 물론 실재는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실재를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다양한 시간과 공간의 조합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세계는 다층적이다. 그래서 우주에 동시는 없다. 순간 하나밖에 없다. 두 개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국부적 순서와 지역적 현재 밖에 없다. 그래 우리들에게는 '지금-여기'가 중요한 것이다. 그 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세계는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가상 세계의 등장으로 '현재'의 개념이 매우 중요 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새로운 지각의 확장, 더 나아가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배움을 통해 그 세계로 진입해야 한다. 새로운 지각을 열어야 한다.
그 방법은 지금까지 자신이 가졌던 가정(if)를 살펴 보아야 한다. 그 가정이 확증편향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지각의 가장 큰 걸림돌이 기존의 가정(if)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존의 가정을 깨는 유일한 방법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가정한테 꼼짝 못하는 게 지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각을 바꾸려면 가정을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가정(if)이 지각을 막는다. 가정이 지각에 박스를 쳐버린다. 무슨 말이냐면, 지각을 꼼짝 못하도록 가두는 우리의 많은 가정들이 지각을 상자 속에 가둔다는 거다. 그게 확증편향으로 확대된다. 그래서 새로운 지각을 가지려면 창문을 새롭게 내야 한다. 가정의 감옥에 있는 유일한 창문을 우리는 개념이라 하고, 그 개념으로 우리는 세상을 본다. 그 개념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프레임,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그래 우리는 '지각은 결코 개념을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을 보는 것이 지각이다. 우리가 보통 알았다고 할 때 우리는 지각한 거다. 그러나 지각은 구속된 능력이다. 왜냐하면 지각은 개념을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는 세계일 뿐이다. 개념이 허용한 창문을 통해서만 세계를 본다. 그러니까 개념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개념이 없으면 세계가 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개념은 가정의 명령 아래 돌아간다는 거다. 그래서 새로운 지각을 갖기 위해서, 아니 새로운 지각을 얻으려면 가정이라는 급소를 찔러야 한다. 그 기술은 질문하는 능력에서 온다. 그리고 그 능력은 배움에서 나온다. 박문호 박사는 이 배움의 기둥을 다음과 같이 4개로 세웠다.
1. 경험
2. 실험
3. 메타사고
4. 대화
개인적인 생각으로 질문을 깨야 할 가정(if)들은 위의 4 가지 기둥에서 나온다고 본다. 그런 배움을 통해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많은 기억들이 잘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이런 배움과 그 기억을 통해, 삶은 발견하는 것이다. 무엇을? 자신이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게 지각의 창문을 새롭게 여는 일이다.
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아니며, 내가 상상한 사랑이 아니다. 지구별은 단순히 나의 기대와 거리가 먼 정도가 아니라, 좌표 계산이 어긋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일들이 플랜 B 속에서 훨씬 더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오늘 아침 사진 속의 꽃봉오리처럼 말이다.
이때 인생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다른 인생'이었다. 그 다른 인생의 기쁨은 부스러기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고 류시화 시인은 주장했다. 이때 질문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내 삶을 사랑하는 거다. 내가 만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면 세상이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야기를 직접 더 들어 본다.
만약 시인 이 세상을 떠나며 영혼들의 교차로에서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려고 엇갈리는 한 영혼을 만난다면, 시인은 그 영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겠다고 한다. "당신이 상상하는 지구 행성이 아닐 거야. 당신이 생각하는 인생이 아닐 거야. 그래서 하루하루가 난해하면서도 설레고 감동적일 거야. 자신의 관념과 기준 속에 갇혀 있지만 않는다면,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을 발견하기 위해 눈을 크게 뜬다면."
신은 비극과 상실을 일으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가슴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계획했던 삶을 기꺼이 놓아 주어야 한다."(조지 캡벨) 우연을 거부하는 것은 신의 계획을 무효화 시키는 것과 같다.
인생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돌아가는 길투성이의 인생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일과 행복한 일은 동시에 일어난다. 플랜A보다 플랜B가 더 좋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더 좋다. 플랜 A는 나의 계획이고, 플랜B는 신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인생은 길을 보여 주기 위해 길을 잃게 한다. 빨리 플랜 B를 택하라. 몇일 전 <나만의 서사 2024-5>에 기록했던 문장들이다. 다시 공유한다.
운명이 생을 덮치는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안다. 그 포충망 속에 사로잡히고 나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회전하고 있을 뿐이다. 고통을 중심으로 하여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슬픔의 계절이 있을 뿐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이다. 그런 때는 희망을 버리면 산다. 희망이 절망적인 유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희망을 버리는 것이다. 풍랑을 만난 배가 물결을 헤치고 그저 앞으로 갈 수밖에 없듯이 온몸으로, 온몸으로 물결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운명이고, 그것이 생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운명이 내 맘대로 내가 원래 계획한 대로 돼야 한다는 집착을 버리면 산다. 그런 마음에 선택한 시를 공유한다.
산다는 것은 1 /최금녀
내 젊었을 적
몇겹의 껍질이 벗겨진
노년(老年)을 바라보고 있으면
쭉정이 저 모양으로 살아야하나
조롱했습니다
스무살엔 서른살을
서른엔 마흔
마흔엔 쉰을 조롱했습니다
쉰엔 예순을
예순엔 일흔을 조롱할건가
마흔보다 젊은 서른이었고
쉰보다 젊은 마흔
예순보다 젊은 쉰일테고
일흔보다 젊은 예순일테니까요
나는 매양 젊었습니다
아마 시간밖으로 내몰린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럴 겁니다
참 산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요.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인문운동가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산다는_거_1 #최금녀 #다른_인생 #플랜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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