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6.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2월 8일)

오늘은 졌다. 그러나 내일은 이긴다. 오늘 이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연대의 힘을 모른다. 하방연대의 힘을 모른다. 순자 왕제王制편에 나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 이 말은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한다'는 뜻이다. 원문은 이렇다. "군자주야 서인자수야君者舟也 庶人者水也": 임금은 배, 백성은 물이니, 수즉재주 수즉복주(水則載舟, 水則覆舟): 강물의 힘으로 배를 뜨게 하지만, 강물이 화가 나면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순자>>의 <왕제편>에 나오는 거다. 백성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식의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군주는 정치의 근본이 백성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우선 공부가 필요하다. 어제 축제 장에서 만난 대중들에게 희망이 있는가 의심하였지만, 각자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어제 내 눈 앞에 스쳐간 것들은 '진짜" 인간-다운, 고민하는 것들은 별로 없었다. 어제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을 하나도 못 만났다. 왜? 다들 시위 현장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다 무지해 보이는, 머리에 든 것이 없어 보이는 것들만, 그리고 외국인들만 지나다녔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축제는 의미가 없다.세상이 거끄로 흐르는 데, 그 끼지 것 돈 몇 푼 더 벌면 뭐하나?
▪ 공부의 시작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들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 곧 ‘깨달음’이다. 깨져야(깨다) 시작할 수 있었고, 알 수 있다(알음).
▪ 그 다음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변방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연대하여야 한다. ‘중심’은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이지만, ‘변방’은 창조와 혁신의 공간이다. ‘하방연대’가 아주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사람, 아픈 사람, 상처받은 사람을 감싸 안는 '하방연대(下方連帶)'야 말로 가장 강력한 연대(solidarity)이다. "다수의 힘없는 연대가 소수의 힘 있는 연대를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약한 사람이 그 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요?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地位)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입니다." 신영복 교수의 <<강의>>에 나오는 말이다.
물이 바다로 흘러가서 만드는 연대, 즉 '하방연대'야 말로 가장 오래가고 강력한 연대이다. 아래로 갈수록 힘은 약하지만 숫자는 다수이기 때문이다. 연대(連帶)는 위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추종이고 영합일 뿐이다. 연대는 물처럼 낮은 곳과 하는 것이다. 잠들지 않는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바다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걸 우리는 '하방연대'라 한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경구로만 여겨질 때가 태반이다. 실제 삶에서는 문이 닫힐 때면 안타깝고 불안해 한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우리는 대안을 빨리 찾아야 한다. 어떻게? 다음과 같은 기억에서 희망을 빨리 소환하는 것이다.
• 시인의 노래처럼 절망 앞에서 정직할 때 희망의 문이 열리긴 했던 기억
• 현명한 이들의 충고
• 시와 영화 같은 예술의 일깨움이 주는 위로이다. 특히 예술은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려고 하는 메타언어이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들은 뻔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잊곤 했던 위로를 나누는 힘이 된다. 함께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때 시인의 노래처럼 그 "끝이 참된 시작"이 될 것이다.
길이 끝나면/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고전은 우리의 머리와 마음을 맑게 한다. 어제 본 일부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정치는 말을 조심하고 아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미디어 앞에 자주 나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상황이 바뀌면 그 말을 지지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제 조**라는 놈을 보면 그렇다. 정치인의 덕목은 "귀언(貴言)"이다. 노자가 한 말이다.
몇 일전에 이미 말햤던 것처럼, 노자에 의하면, 가장 훌륭한 리더는 존재 정도만 알려진 자이고, 그 다음 그를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자이고,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 하고, 그 다음은 그를 비웃거나 업신여긴다. 4 단계이다. 무위(無爲)와 유위(有爲)의 차이를 설명하는 장이기도 하다. 무위는 사람들이 그것이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이며 노자는 이것을 최상의 도라고 말한다. 유위함에는 세 단계가 있다.
▪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송하는 단계(親而譽之)이고,
▪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단계(畏)이고,
▪ 사람들이 멸시하(업신여기는)는 단계(侮)이다.
가까이 하고 칭송한다는 것은 통치자와 피통치자, 상사와 부하 사이에 나름의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민주적 소통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위한 리더십도 현실적으로 유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항구적일 수는 없다. 아무리 훌륭한 유위의 리더십도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화되면 틈이 생긴다. 통치자와 피통치자, 상사와 부하 사이에 틈이 벌어지면 기존의 신뢰관계만으로는 조직을 다스리거나 유지할 수 없다. 그래서 때로는 두려움이라는 기제를 동원해서 조직을 통제해야 한다. 이러한 기제는 현실에서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이며 불통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신뢰관계는 더욱 훼손되고 결국에는 서로를 멸시하는 단계에 이른다. 유위의 리더십이 최악에 이르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불신에 이르게 된다. 믿음,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최상은 무위함이다. 무위로 나라를 다스리면 일이 성사되어도 시민들은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며, 서로 공로를 인정받으려고 다투지 않는다. 그러므로 국가의 신뢰체계가 깨지지 않고, 지도자의 말에는 더욱 더 큰 무게가 실린다. 제17장 원문과 번역을 공유한다.
太上 不知有之(태상부지유지) : 가장 좋은 다스림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자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其次 親而譽之(기차친이예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송하는 것이고
其次 畏之(기차외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고
其次 侮之(기차모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멸시하는 것이다.
信不足焉(신부족언) 有不信焉(유불신언), 말의 믿음이 부족해지니 불신이 판을 치게 된다.
悠兮 其貴言(유혜 기귀언) : 잘 다스리는 자는 말을 아끼는 것이 조심스럽다. 말을 삼가고 아낀다.
功成事遂(공성사수) 百姓皆謂我自然(백성개위아자연): 공을 이루고 일이 끝나면, 백성들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즉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 한다.
여기서 "태상(太上)", "기차(其次)"라는 말은 리더십 모델, 또는 정치 모델의 가치서열을 이야기 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냥 형용사적으로 해석하면 된다. 그 다음 "부지유지(不知有之)"는 판본에 따라 "하지유지(下知有之)"로도 읽는다. 그렇게 읽으면, '다스림 밑에 있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있다는 것만 안다'가 된다. <도덕경> 제2장에서 말한 대로 도의 이상을 구현하는 성인은 "무위지사(無爲之事)"에 처하고, "불언지교"를행하기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존재의 부담을 느끼지 않고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안다는 것이다. "무위지치(無爲之治)"의 형태를 술한 것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은 "하지유지'로 보고 이렇게 해석한다.
그 다음은 유교적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정(仁政)을 말한다. 그러니 "친(親, 편애)"함이 있고, "예(譽, 칭찬, 포상)"함이 있는 정치이다. 그 다음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는 법치(法治)주의의 가혹한 형태이다. 이는 법에 준거하여 형법적용을 엄밀하게 할 것이니, 백성을 자애하는 것이 아니라, "외지(畏之, 무섭게 한다)"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정치는 아예 국민에게 모멸감을 주는 정치이다. 이것은 군중이 항거하는 어지러운 정국을 진압하는 폭정을 의미한다. 이 4 가지의 정치 형태를 운운한 후에 노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정치의 핵심을 말한다.
노자가 생각하는 정치의 핵심은 지도자의 말, 즉 언어(言)이다. 말은 지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말[言]은 그릇[口]에 형벌 도구인 여(余, 바늘)를 꽂아서 신에게 맹세하는 일이다. 이때 '口'는 ‘입’이 아니라 ‘신에게 바치는 축문을 담은 그릇’이다. 갑골이나 청동기에는 ‘ㅂ’ 닮은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모든 말에는 신성이 깃들어 있어서, 발화만으로도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면 신의 벌이 내리므로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 신은 언어에 깃든 뜻을 살펴서 되새길 줄 아는 사람에겐 지혜를 주지만, 말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자한테는 재앙으로 갚는다. 공자는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민첩하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말의 힘을 거스를까 저어했기 때문이다. 서양의 사유가 소피스트의 말 잘하는 법(수사학)에서 시작했다면, 동양 사상은 공자와 노자의 어눌함에서 출발했다. 공자는 항상 꾸민 말[巧言]이나 헛된 말[佞言]보다 더듬는 말[訥言]을 칭찬했다." (장은수)
사람 다움은 말에서 시작된다. 사람다운 인간의 격은 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나날이 노력하고 자신과 싸워서 얻어야 하는 덕목이다. 동물적, 이기적 인간[己]이 뜻을 정성스레 하고 자신을 다듬는 과정[修己]을 통해 저열한 욕망을 이기고[克己] 함께 사는 법[禮]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날 때 비로소 ‘인간 답다’ 라고 말한다. 인간의 품격은 늘 신의 뜻을 물어 자신을 바로잡고, 그 뜻에 거스르는 바를 무찌르는 사람한테만 존재한다. 노자가 꿈꿨던 성인(聖人)은 인간이 이루어야 할 궁극의 인간형이자 이상적 인격이다. '성(聖)'은 축문을 읊으면서[口] 발꿈치를 높이 들고[壬] 신의 목소리를 듣는[耳] 일이다. 성인은 사람 다움[仁]을 완전히 체득해서 무엇을 하든지 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이루려 할 때 남을 이루게 한다. 자신이 서려고 남을 주저앉히는 일에는 인간이 없다.
말의 중요성은 막말 문제만이 아니라,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증명될 수는 행위, 사업의 결실로 나타나야 한다. 특히 지도자의 말은 더 하다. 노자도 말의 '신(信)'을 강조했다. 위의 문장에서, 우리는 "신"을 "말의 신험(信驗, 신비한 영험)'을 의미하는 것으로 푼다.
"정치란 본시 목숨을 거는 것이다. 되지 않을 것을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권력을 내 몸에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을 바쳐서 행사는 것이다."(도올 김용옥) 그러니까 "귀언(貴言)"이 "귀신(貴身)이다" 라는 거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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