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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술은 한 자루의 칼이다.

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어제는 '취한' 봄밤을 위해 낮부터 마셨다. 오후에 천안 친구들과 정례 탁구 모임이었는데, 한 친구가 옻순과 와인을 가져왔다. 옻순은 이미 예정된 것인데, 성당에서 사용하는 미사주 와인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 와인을 나 혼자 다 마시며, 탁구 운동을 했다. 천안 친구들의 전략이었다. 그래 우리 대전 팀이 졌다. 새로운 기분이었다. 이어진 저녁 자리에서는 청하를  주전자에 부어 따뜻하게 마셨다. 일품이었다. 그리고 20 여분이면 오는 KTX로 대전역에 내려 와, 대전 친구와 헤어졌다. 그리고 나의 봄밤이었다.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뜻하는 바는 단지 도취에 빠지고, 동물적 본능이나 분출시키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참된 의미는 창조성에 있다. 창조력이 결여된 도취는 광기가 아니라 객기이고,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으로 흘러갈 뿐이다. 술은 파괴력과 창조력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야누스적 존재다. 잘 쓰면 약이 되고 잘 못 쓰면 독이 된다. 디오니소스를 소개하고 있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한 부분을 읽어본다.

"나는 곡식과 과일 그리고 이로 빚은 술의 신이자 곧 곡식과 과일 그리고 술이다. 내가 썩어 술이 되거든 너희가 마셔라. 너희가 썩어 술이 되면 내가 마시리라, 마시고 취하고 싶은 자는 취하라. (...) 너희들의 목적은 술이 아니다. 광기도 아니다. (…….) 나는 누구인가? 바꼬스(싹)이다. 씨앗이 대지에 들었다가 제 몸을 썩히고, 싹을 내고, 자라고, 열매를 맺고, 다시 대지에 들어 제 몸을 썩히는 이치를 생각하라. 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한 알의 곡식과 과일이 있는 이치를 생각하라. 그리고 너희가 그 자리에서 다시 하나의 생명으로 곧게 설 방도를 생각하라. 그것이 목적이다. 내가 너희에게 준 술과 술자리는 쾌락이 아니라 한 자루의 칼이다. 너희는 자루를 잡겠느냐, 날을 잡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준 술은 무수한 생명이 뒤섞여 있는 카오스의 웅덩이다. 너희가 빠져 있겠느냐, 헤어 나오겠느냐?“

술은 한 자루의 칼이다. 카오스(혼돈)의 웅덩이다. 술을 단순히 취하려는 목적으로만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술을 통해 다시 부활하라고 말한다. 술과 함께 일상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자아를 잊은 망아(忘我)의 상태로 들어간 뒤, 그 망아의 정점에서 우리는 생성과 소멸이 곧 하나인 자연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우리 또한 자연의 한 씨앗임을, 한 씨앗으로 태어나 한 생을 살고 갈 뿐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러니 속세의 욕망과 고통에 얽매여 괴로워할 것도 없고, 그저 겸손히 자연의 도도한 흐름 속으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봄이 오면 나의 죽음을 딛고 또 다른 씨앗이 꽃을 피울 것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어둠 속을 전력 질주해도 빛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매장(埋葬)된 것이 아니라, 파종(播種)된 것이다. 매장과 파종은 다르다. 파종은 씨앗이 꽃을 피우게 하는 것이다. 그래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멋진 봄밤이었다. 아침에 정상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봄밤/권혁웅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
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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