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문학이 온갖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 건강을 개선할 수 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5월 4일)

오늘 아침은, 네 번째로 앵커스 플레처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한다. 나는 문학이 온갖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 건강을 개선할 수 있다는 주장을 보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방식이 무언가를 정리하고 싶기도 하였다. 오늘은 호머의 <<일리아드>>와 함께 문학이 주는 '용기 촉진제' 이야기를 한다. <<일리아드>>가 영웅들의 용맹한 활약상을 보여주며 우리들에게 우리 자신을 영웅으로 변모 시킨다.

용기는 서술자(narrator)라 부르는 문학 발명품과 함께 시작된다. 서술자는 스토리 뒤에 숨겨진 마음을 가리킨다. 스토리를 들려주는 사람(storyteller)의 기분과 기억, 본능, 태도, 열정, 욕망, 믿음을 아우른다. 석기 시대에는 스토리를 살아 있는 입으로 발화를 했다. 그러한 입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감나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핵심은 어조(tone)와 취향(taste)이었다.
- 어조는 목소리의 울림과 음색이었다. 예를 들어 터무니 없는 우연을 말할 때는 껄껄 웃는다.
- 취향은 목소리가 선호하는 주제였다. 예를 들어 자연과 계절에 집중 하거나 사랑이나 전쟁 등을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다가  이야기 꾼들은 구술 목소리를 그림과 조각과 춤 같은 시각 매체로 옮기는 방법을 발견했다. 기원전 8000년 경이다. 그들은 어조를 구술에서 시각으로 옮기기 위해 개인적 스타일이라는 굉장히 독창적인 특징을 고안했고, 취향을 옮기기 위해 서술 초점(focus)으로 알려진 놀라운 도구를 고안했다.  초점을 활용해서 카메라 렌즈처럼 특정 대상과 사건에 집중해 이야기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나머지 대상을 배경으로 흐릿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글쓰기의 출현과 함께 스토리텔링은 또 한 번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기원 전 5000년 쯤이다. '문자'로 표현되는 새로운 종류의 문학 서술자를 만들어냈다. 이로써 인간 정신의 심리적 확장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육체의 스트레칭(확장)을 시도하지만, 문학 작품 등을 이용해 정신의 스트레칭 시도도 중요함을 이젠 난 인지했다.

처음 '문자' 서술자는 신의 목소리로 말하는 서술자였다. 인간 저자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서술자, 나무나 강이나 짐승의 목소리로 말하는 서술자였다. 전능한 하느님의 목소리로 스타일이 단순하고 선언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리고 초점은 은하계 전체를 아우른다. 우리는 그 전능한 존재를 '전지전능한 서술자(God's Eye narrator)' 또는 간단하게 '하느님의 목소리(God's voice)'라 부른다.

전지전능한 서술자는 듣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목소리처럼 들리게 한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강력한 감정을 일으킨다.
- 하나가 경이(驚異, 놀랍고 신기하게 여김)이다. 이 경이는 확장(정신의 스트레치)에 의해 도출된다. 하느님 목소리는 사소한 진리를 보편적 진리, 작은 법칙은 불변의 법칙으로, 한 줄기 빛을 방대한 우주적 광휘로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삶의 모든 것을 더 크게, 익숙한 것을 더 신성하게 느끼도록 한다.
-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경이와 비슷한 감정이다. 우리 뇌를 확장시키는 거대함(bigness)이 두려움을 유발하여 맥박을 뛰게 하고 등골을 오싹하게 한다. 두려움은 듣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준다.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심지어 정신적 외상을 일으켜, 뇌리에서 맴돌며 반복되는 고통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래서 두려움은 심리 통제를 위해 쓰이던 도구였고, 지금도 그런 도구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호머의 <<일리아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를 두려움으로 짓밟는 것과 반대로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를 용기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앵커스 플레처에 의하면, 용기는, "어원적으로 보면, 위험한 순간에 혈관을 타고 돌진하는 공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기운이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용기는 한 감정으로 다른 감정을 상쇄하고,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는 심리적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거였다. 앵커스 플레처는 이 용기를 현대 신경과학으로 설명을 한다.

"용기의 신경계 기원은 뇌의 원시 중심부 깊숙한 곳인데, 그곳에 편도체라는 물방울 모양의 겁쟁이 폭군 둘이 편안하게 자리자고 있다 한다. 예컨대, 편도체는 위험을 감지하자마 두려움에 휩싸여서 우리가 하던 일을 바로 팽개치게 한다. 그리고 교감신경계와 수도관주의 회색질 등 뇌의 위협-반응 네트워크의 다른 요소들을 자극해 아드레날린과 천연 오피오이드 진통제 혼합물을 방출하게 한다. 어울러 우리의 심박수를 증가시키고 통증 감각을 둔화 시켜 우리를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그런데 두려움에서 비롯된 이 열띤 기분은 용기가 아니다. 이 힘의 본래 생물학적 목적은, 우리를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신경성분을 한 가지 더하면 용기로 전환될 수 있는데, 그 성분이 옥시토신이다."

일명 '사랑의 호르몬'이라 불리는 옥시토신은 아기를 낳을 때 산모의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자궁 수축 호르몬으로,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옥시토신은 산모와 신생아를 결합시키는 호르몬이지만, 키스나 포옹을 할 때 연인 사이의 애정을 높이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옥시토신은 코티솔 등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하고, 통증을 완화하며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옥시토신은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분비될 수도 있다. 예컨대 위험에 처한 사람이 가까이 있다고 감지하면 옥시토신을 분비한다. 우리 인간은 옥시토신 분비 덕분에 대다수 동물들과 다른 식으로 위험에 반응할 수 있다는 거다. 우리 인간은 옥시토신이라는 사회적 유대를 통해 훨씬 더 효과적인 생존전략을 펼칠 수 있었다는 거다. 이 전력을 과학자들은 "보살피고 도와주기(tend-and-befreind)'라 부른다. 예컨대, 기근이나 역병처럼 위험이 지속되는 시기엔 뇌하수체에서 감지된 다른 위협받는 사람들과 함께 음식이나 약을 공유하고, 매복 공격처럼 위급한 순간엔 바로 뭉쳐서 전투 대형을 형성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일차적인 공포 반응으로 촉발된 다음과 같은 신경화학물질과 결합하면, 심장에서 세 배나 뜨거운 열기가 솟구친다. 이 신경화학적 묘약은 우리에게 활기를 불어넣고 고통을 덜 느끼게 하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게 한다. 가슴 속에 타오르는 이 불꽃(heart flame)이 용기이다.
- 피를 뿜어내는 아드레날린의 열기
- 고통을 덜어주는 천연 오피오이드의 열기
-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옥시토신의 열기

앵커스 플레처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인들도 옥시토신을 더하면 불안감을 용맹한 투지로 바꿀 수 있음을 알았다는 거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옥시토신이라 부르지 않고, 찬가(paean)라는 문학적 이름으로 불렀다. 찬가는 신에게 바치는 노래이다. 글이 길어지니, 찬가 이야기는 내일로 미룬다.

매주 화요일은 서울 강의를 다녀오는 날이다. 하루가 '확' 지나간다. 저녁에는 집에 도착하자 마자 주민자치회'에 참석했다. 공동체에 필요한 것이 옥시토신이다. 그러려면 좀 더 서로의 소통이 필요하다. 옥시토신을 동아시적 사유로 말하면, 측은지심(惻隱之心) 같다. 이 마음은 사랑(仁)으로 부터 나오는 거다. 남을 나와 다르게 보지 않고, 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네가 갖고 싶은 것을 상대도 갖고 싶어하는 것을 우리 양심으로 안다. 그러니 '자랑 질' 하지 말라는 거다.

나는 최근에 높은 갈등 지수를 가지고 있다. 갈등이라는 단어는 칡 갈(葛)과 등나무 등(藤)을 쓴다. 칡은 덩굴을 왼쪽으로 감고, 등나무는 덩굴을 오른쪽으로 감는데, 이 두 개체의 덩굴이 워낙 질겨 서로 얽히기라도 하면 잘라 내기 힘들어지는 모습에서 착안된 것이다. 하물며 서로 다른 방식의 생각을 굳건히 지켜온 개인이나 집단 간의 충돌이야 얼마나 잘라 내기 힘든 것일까? 얽히고설킨 문제는 당연히 기대만큼 서둘러 풀리지 않고, 우리는 풀리지 않는 문제에 성급히 분노하며 답답해 한다. 갈등이 아주 없는 조직은 건강한 조직이 아니다. 갈등은 제대로 해소하면 조직의 변화와 발전의 동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갈등론자들의 꾸준한 테제였다. 다만 갈등 해소의 노력은 구조나 개인 중 어느 한쪽 방향에서만 일어나서는 효과가 없다. 거시적 차원에서는 조직 구조와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이 계속되고, 미시적 차원에서는 개인들의 신뢰와 여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은 갈등 해결의 핵심 요소이다. 말은 쉽다. 그러니 나부터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데 치중할 일이다. 그건 오늘 시와 사진처럼, 우선 모두 다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박형진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사진하나_시하나 #박형진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우리는_지금_문학이_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