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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홀로 있음의 용도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 #복합와인문화공간뱅샾62 #아해야 #박노해 #어린이날 #홀로_있음

2710.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5일)

오늘은 5월 5일 어린이 날인데, 주일이다. 그래 내일도 대체 공휴일로 연휴이다. 어린이가 없는 나는 동해안으로 1박 2일 여행을 간다. 2013년 대체 공휴일은 설과 추석 연휴, 어린이 날에만 적용하였다. 그 뒤 2021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한한 규정'에 따라, 3,1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로 확대 적용된 데 이어, 2023년부터 부처님 오신 날과 성탄절까지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대체 공휴일이 적용되지 않는 법정 공휴일은 새해 첫날과 현충일 뿐이다.

작년처럼, 올해도 어린이 날에 비가 내린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슬퍼할 것 같다. 올해도 세상의 모든 어린를 위해,  박노해 시인의 <아이야>를 공유한다. "아이야, 착하고 강하여라/사랑이 많고 지혜로워라//아름답고 생생하여라/맘껏 뛰놀고 기뻐하고 감사하며/네 삶을 망치는 것들과 싸워가라."

아이야/박노해

아이는
온 우주를 한껏 머금은 장엄한 존재

아무도 모른다
이 아이가 누구이고, 왜 이곳에 왔고,
그 무엇이 되어 어디로 나아갈지

지금 작고 갓난해도
영원으로부터 온 아이는
이미 다 가지고 여기 왔으니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되어주고,
‘뜨거운 믿음의 침묵’으로 눈물의 기도를 바칠 뿐이니

아이야, 착하고 강하여라
사랑이 많고 지혜로워라
아름답고 생생하여라

맘껏 뛰놀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네 삶을 망치는 것들과 싸워가라

언제까지나 네 마음 깊은 곳에
하늘 빛과 힘이 끊이지 않기를

네가 여기 와주어 감사하다 사랑한다

사실 아이, 어린이, 아동의 발견이란 근대에 이르러 ‘개인’의 발견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어린이날의 탄생과 전후해, 그들 역시 하나의 인격체이며 일대일로 관계 맺을 수 있는 자아를 가진 존재라고 우리는 인식하게 됐다. 어린이날에 이르러 우리는 한 번 더 아이들을 돌아볼 기회를 가진다. 나의 아이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어린이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날이다.

그러면 부모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그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건 나의 일이 아닐 것이다. 부모가 스스로 한 개인으로서 행복하고, 그래서 아이가 자연스럽게 그 길을 지향하게 만드는 것, 대신 아이가 따라올 그 길의 돌을 몇 개 골라 내어 조금은 덜 넘어지게 하는 것, 부모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 그런 것이다.
- 아이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되 자신이 원하는 문법으로 빨간 줄을 그어 교정하려 하지 않는 일.
- 부모도 아이도 저마다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써 나갈 때, 그리고 그 언어가 자연스럽게 닮아갈 때, 그 어느 존재보다도 멀면서도 가까운 하나의 공동체가 탄생한다.

경제활동을 해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는 것을 경제적 자립, 물리적 자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정서적인 자립이 필요하다.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어떤 현상을 나로서 바라보고 사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그건 어린 시절부터 행복한 부모를 보고 그 길을 따라가는 아이들에게 길러지는 힘이다. 정서적 자립을 하지 못한 사람이 성인이 되고 부모가 된다고 해서, 그가 사회인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자립한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부모와 아이는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한없이 가까워지다 못해 동일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나의 욕망을 아이에게 대리시키는 게 괜찮은 것인가? 그건 서로를 불행하게 할 뿐이다. 나는 그들이 내 눈치를 보는 대신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어울리게 하는지 스스로 선택해 나가며 한 개인으로서 자립하기를 바란다. 어쨌든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

이젠 몇 일전부터 읽고 있는 마이클 해리스의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이야기를 이어간다. 동물들을 보면, 새끼들이 성장하도록 일부러 혼자 내버려둔다. 그러나 불안한 인간 부모는 혼자 있을 시간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기가 자극과 사회성의 수준을 스스로 규제할 능력을 키우는 것을 부모가 방해한다.

심리학자 에스터 부크홀츠(Esther Buchholz)에 의하면, 우리는 자신을 위한 일 뿐만 아니라 타인과 연결될 준비가 된 상태로 태어난다. 두 가지 필요, 홀로 있고 싶은 마음과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는 필수적이라는 거다. 홀로 있음이 없으면 아이는 자율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며, 우리의 사회적, 심리적 병증 가운데 대다수가 일차적으로 자기 조절 장애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한다. 이제는 몸을 가진 동료 외에 디지털 동료 와도 함께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더 많이 '접촉'할 경우 이상한 종류의 외로움, 즉 "군중 멀미"를 느끼는 한계선에 도달한다.

우리는 친교 관계라는 것이 홀로 있음의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홀로 있음의 대안은 절대로 친교가 아니라, 외로움이다. 외로움은 늘어난다. 사회적 연대가 취약해지면서, 사회적 자본이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교통 사고로 인한 사망보다 취약한 사회적 연대로 인해 자살하는 사례가 더 많아지고 있다는 거다.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는 '관계'들이 대폭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인은 역사상 가장 많이 관계를 맺는 인간이 되었지만, 고립을 막아주는 어떤 대비책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외로움의 치료법이 흔히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이지만, 홀로 있음을 연습하는 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홀로 있음의 가치를 잊고 산다. 홀로 있음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 홀로 있음의 첫 번째 장점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능력이라고 심리학자 앤서니 스토(Anthony Storr)는 말한다. 그에 의한면, 유레카의 순간은 회의 테이블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과감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서는 군중에게서 벗어나 물러서는 과정이 항상 필요했다. 예컨대, 석가모니는 나무 아래에서 홀로 명상하였고, 예수는 광야에서 40일을 홀로 지냈다. 그 외 창조적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성인이 된 뒤 타인들과 거리를 두고 홀로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거다.
- 두 번째는 자아에 대한 지식(자기 인식) 또는 자가 치유 효과가 있다는 거다. 똑같이 반복되는 사회 생활에서 자신을 격리시키면 일상적 삶의 복잡한 상황에서는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 자기 이해와 깊은 내면과 접촉이 증진된다는 거다. 홀로 있음이 사람들의 정신적 자유를 드높이고 타인의 존재로 인해 불가피하게 생성되는 간섭적 자의식을 최소한으로 줄여 우리의 족쇄를 풀어준다. 인간은 생각과 행동 양면에서 굴레 없는 자유가 필요할 때 홀로 있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헐벗은 자아를 마주하는 것은 긴장되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자아와의 직접 대면을 하면, 융이 말하는 "개별화(individuation)'라는 것이 일어난다. 개별화는 자기 자신을 그것이 속한 종과 구별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능력이다. 이로써 홀로 있음은 무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아가 결국은 괴물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 세 번째는 홀로 있음은 타인과의 연대하는 것이 더해진다. 사실 사람들이 있는 자리를 떠난다고 해서 '간접적, 또는 대체적 개입'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어머니에게  작별을 고하고 난 뒤에도, 5분 정도 어머니가 보여주는 관심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계속 느낄 수도 있다. 제대로 홀 있는 법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완전히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아끼는 사람들에 대한 위안과 지식을 늘 간직한다. 이 기억이 없다면 홀로 있음을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니까 홀로 있으면서 행복한 사람은 타인의 사랑에 대한 믿음도 확고하다. 혼자서도 행복한 사람은 타인의 사랑에 대한 신뢰의 확인이기 때문이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주기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힘들어하지 않는다.

요약하면, 홀로 있음의 용도는 새 아이디어, 자신에 대한 이해, 타인과 가까이 있기, 이 세 요소를 포용하면 풍부한 내면의 삶을 구축할 수 있다는 거다. 결국 홀로 있음이란 절대로 군중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홀로 있음은 그 속에서 이런 이득을 수확할 수 있는 어떤 자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홀로 있음의 자원을 찾고, 그것이 잘 유지될 영역들을 확인하는 거다. "사람은 사회 안에서 훈육될 수 있지만, 영감을 얻는 것은 홀로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괴테는 말했다.

실제로 전화벨 소리나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같은 외부 자극이 없을 때 우리의 뇌가 하는 활동은 몽상이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몽상이 가리키는 마음의 상태를 억눌러야 한다고 배워왔다.  아마 우리는 몽상이 게으른 손이라는 죄악과 관련되기 때문에 모르는 체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게으른 사람은 홀로 있지 마라, 홀로 있다면 게으르지 마라'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은 용도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배웠다. 몽상, 또는 정처 없는 마음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무방향적 사유 과정'이라 한다.

뇌가 외부 상세계를 향한 인지 활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할 때, 다른 말로 하면 몽상에 빠지기 시작할 때,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 영역이 활성화 된다고 한다.  이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이야기는 내일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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