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아이의 일상을 단순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아카시아 나무는 원래 바른 이름이 아까시 나무다. 박화목 작사, 김공선 작곡의 동요 <과수원 길>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 그리고 해태제과에서 1976년에 출시한 아카시아 (껌) 시엠송을 범인으로 보는 이도 있다. "아름다운~ 아가씨~ 어찌 그리 예쁜가요~ 아가씨 그~윽한 그 향기는 무언가요 아~ 아~ 아카시아 껌"

오늘은 어린이 날이라 하잔한 오전이다. 그래서 밤사이 내린 비로 세수를 말끔히 한 신록의 나무들을 보려고 일찍 주말농장에 다녀왔다. 주말 농장 주위에는 아카시아 꽃들이 만발했다. 거기에 맞추어 양봉 업자들이 분주했다. 어렸을 때 우리는 막 피어난 싱싱한 아카시아 꽃을 따 먹었다. 꽃자루에 달콤한 꿀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카시아 꽃을 찹쌀가루에 버무려 아카시아 백설기 만들어 먹기도했다.

아까시 나무는 북아메리카 원산으로 1900년 초에 무분별하게 벌채에 황폐해진 산림을 복구하고 땔감으로 이용하기 위해 전국에 심어 우리 땅에 정착한 귀화 식물이다. 이 나무는 오늘 아침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해마다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향긋하고 아름다운 꽃을 가득 피워 사람들이 즐겨 먹는 달콤한 꿀을 제공해주기도 하는 고마운 나무이다. 그리고 인문운동가로서 나는 아카시아 나무를 좋아한다. 이 나무는 어릴 적에는 가시가 많지만, 나이를 먹으면 가시를 없앤다. 인문정신을 고양시키는 나무이다.

오늘 아침에 공유하는 시는 아까시보다는 아카시아라고 불러야 꽃향기가 생생하게 느껴진다고 하면서,  [먼. 산. 바. 라. 기.]님이 소개한 것이다. <김밥의 시니피앙>. 말에는 개인의 추억과 정서가 묻어 있다. 똑 같은 김밥이라도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다르다. 시인은 [김:밥]보다는 [김빱]에서 유년 시절의 가난과 정을 추억한다. 김밥으로는 시인이 가지고 있는 느낌과 정서를 담아내지 못한다. 자장면이 표준말이지만 짜장면이라고 해야 제 맛이 나는것과 마찬가지다. 아빠보다는 아부지라고 해야 내 아버지가 살아난다.  이런 점이 말이 단순한 과학 기호와 다른 점이다. 같은 기호이지만 말이나 글에는 인간의 경험과 정서가 녹아 있으며, 하나의 시니피앙도 수만 개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런 점이 사람 사이의 소통과 이해를 가로막는 벽이 되는지도 모른다. 앞에서 말했지만, 아까시보다 아카시아라 불러야 향기가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린 시절 불렀던 동요 <과수원길>과 오래 씹었던 '아카시아 껌'이 그립다.

김밥의 시니피앙/정일근

표준어로 유순하게 [김:밥]이라 말하는 것보다
경상도 된소리로 [김빱]이라 말할 때
그 말이 내게 진짜 김밥이 된다
심심할 때 먹는 배부른 김밥이 아니라
소풍 갈 때 일 년에 한두 번 먹었던
늘 배고팠던 우리 어린 시절의 그 김빱
김밥천국 김밥나라에서 마음대로 골라 먹는
소고기김밥 참치김밥 김치김밥 다이어트김밥 아니라
소풍날 새벽 일찍 어머니가 싸 주시던 김밥
내게 귀한 밥이어서 김밥이 아니라 김빱인
김빱이라 말할 때 저절로 맛이 되는
나의 가난한 시니피앙

  
'시니피앙'은 프랑스어 동사 시니피에(signifier)의 현재분사로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며, '시니피에'는 같은 동사의 과거분사로 '의미 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우리 말로는 '기표'와 '기의'라고 한다. 전자의 기표란 말이 갖는 감각적 측면이다. 이런 구분은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한 말이다.  기표와 기의는 언어라는 기호의 형식이 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좀 어려운 말을 해 본다. 소쉬르의 언어 이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호가 자의적이라는 사실이다. 그 의미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 연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기호의 가치는 기호들 간의 관계와 그 차이에서 나온다는 사실 같다. 예를 들면 '김빱'은 가난의 기의(시미피앙)이지만, 자의적인 것이다.

오늘은 어린이 날이다. 나는 지난 주부터 <맘(MOM)이 편해졌습니다>라는 책을 정독하고 있다. 이 영어 제목이 <simplicity parenting>이다. 아이의 본성을 찾아 주려면, 아이의 일상을 단순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에게 더 많은 여유와 행복감을 선물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지나치게 선택의 폭이 넓고 복잡하며 바쁜 현대 생황이 어떻게 부모와 아이 모두를 압도해버렸는지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육아책을 소개되고 있지만, 나는 내 삶을 단순화 시키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우리 식으로 육아 하면, 아이를 키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영어 'parenting' 속에는 아이를 키우며 부모도 제대로 된 부모가 된다는 시니피에(기의, 의미)가 느껴진다.

어쨌는 한 아이를 키우려면 부모, 학교, 사회가 모두 합심해야 한다. 다음 일화를 소환하고, 글을 마친다. 한 초등학생 소녀가 학교에 가자 마자 담임선생님에게 길에서 주워 온 야생화를 내밀며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선생님은 꽃을 한참 보시더니 말했다. "미안해서 어떡하지, 선생님도 잘 모르겠는데 내일 알아보고 알려 줄게." 선생님의 말에 소녀는 깜짝 놀랐다. 선생님은 세상에 모르는 게 없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 온 소녀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오늘 학교 가는 길에 주운 꽃인데 이 꽃 이름이 뭐 예요?  우리 담임선생님도 모른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런데 소녀는 다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믿었던 아빠도 꽃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녀의 아빠는 식물학 전공 교수로 대학에서 강의하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간 소녀를 담임선생님이 불렀다. 그리고는 어제 질문한 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소녀는 아빠도 모르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알려준 선생님이 역시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그런데 사실은 어젯밤 아빠가 선생님에게 전화하여 그 꽃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던 것이었다. 아빠는 그 꽃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딸이 어린 마음에 선생님께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다.

학교 교육과 가정교육은 100년의 약속이다. 100년의 미래를 위해 100년의 시간을 준비하는 길고 긴 과정이 바로 교육이기 때문이다. 가정교육과 학교 교육이 잘 연계되고 조화를 이루어 가정에서는 스승을 존경하도록 가르치고, 학교에서는 부모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치면 이상적인 인성교육을 할 수 있다. "교육은 그대의 머릿속에  씨앗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씨앗들이 자라나게 해 준다"고 한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디지털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정일근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