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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질문의 힘은 개념의 정의를 다시 묻는 것이다.

4년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은 어린이 날이라 공휴일이다. 난 축하해줘야 할 어린이가 없어, 크게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앞으로 살아야 할 어린이들을 위해, 코로나 19 이후의 세계에 대해 질문을 해보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는 어떨까? 어때야 할까? 이번 연휴에 나는여러 학자들의 칼럼과 대담들을 인터넷으로 찾아 읽고 유투브로 들었다. 그러면서 한근태의 『고수들의 질문법』을 읽었다. 이 내용도 조금씩 공유할 생각이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확실한 것은 한국의 코로나19 대처 능력이 전 세계의 칭송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언론에서는 “요즘처럼 국뽕이 차오른 적이 없다” “한국이 선진국인 것은 우리만 몰랐다”고들 하면서 호들갑이다. 나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국뽕이란 국가와 히로뽕이 합쳐진 말이다. 이럴수록 인문운동가는 냉정해야 한다. 슬라이보 지젝크는 "우리 모두는 코로나호에 함께 타고 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코로나의 특성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숙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영국 총리부터 스페인 공주, 할리우드 스타들까지 빈부와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 19 호에 우리는 같은 배가 아니라, 다른 배를 타고 있다. 인하대 윤홍식 교수의 주장이다. "공무원, 대기업 정규직, 교직원 등 안정적 직장을 갖고 있거나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에게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는 난생처음 겪는 일상의 소소한 불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일용직,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 영세 자영업자 등 불안정한 고용 상태에서 생계를 이어 가던 수많은 이웃들에게 강제된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는 생존의 문제였고, 여성들에게는 돌봄을 불평등하게 책임져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질문해 본다. 왜 성공한 방역의 편익은 보편적으로 향유하면서 그 성공적 방역을 위한 희생은 힘없는 사람과 여성이 감내해야 하는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 하루 종일 한 명도 오지 않는 가게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하는 이들에게 외국 언론의 찬사는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들어야 하는 잔칫집의 흥겨운 풍악소리"(윤홍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울대 장대익 교수의 주장처럼, '국뽕'으로부터 깨어나,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선성장 후분배’라는 약속을 믿고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내했고, 금붙이를 모으고, 대량해고를 받아들이며 외환위기를 극복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돌아온 건 이전보다 더 심각해진 불평등한 세상이었다. 촛불항쟁을 통해 불의(不義)한 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한 정부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약속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자신의 노력보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더 중요하다."(장대익) 이 점을 무시하면 안 된다. 성공적 방역은 코로나19라는 전염병으로부터 지위고하, 빈부, 성별을 가리지 않고 국민 모두를 보편적으로 지켜냈지만 성공적 방역을 위한 희생까지 공정하게 분배하진 않고 있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문명의 중심 방향은 '서진(西進)'이었다. 그래 나는 그 역사 흐름 방향이 절대 바꾸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코로나 19 이후로 역사 흐름의 방향이 바뀔 것이라 나는 믿는다. 국뽕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든다. 투명성, 시민의식, 민주주의. 서구를 지칭하던 말들이 한국의 상징이 됐기 때문이다. 놀라운 반전이다. 서양에 대한 열등감에 백 년 넘게 서쪽 끝만 바라보며 죽도록 달려왔는데,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결국 돌고 돌아 동쪽 끝에 와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서구가 가 보지 못했던 길을 가면서 우리의 경험과 판단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놀라운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며 따뜻한 일상을 우리 미래의 어린이들에 물려 주기 위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장대익 교수의 이야기이다. "우리 방역 시스템의 여태까지의 성공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여줄 만하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과 같은 일상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탁월한 대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존감을 ‘K방역’이라고 꼬리표를 달아주고 홍보하는 쪽에 힘쓰기보다는 남아있는 본질적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심리적 동력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다른 선진국들보다 이번 방역 문제를 잘 풀었으니(우쭐), 이제 우리를 좌절케 하는 고질적 문제들을 다시 천착해보자’는 식으로 말이다." 심리적 동력이라는 말에 나는 방점을 찍는다. 이 에너지를 어디다 쓰느냐 하는 것이다. 좀 더 따뜻한 나라를 만들었으면 한다.

윤홍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모두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약한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역사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그분들의 삶을 코로나19 이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한국 사회가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처럼, 함께 껴안고 나아가야 한다. 아침 사진을 보라.

숲/이영광

나무들이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기합)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有心(유심)히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따구리와 저녁 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자)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다 통과시켜주고도 제자리에, 고요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저자 한근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일상에서 한다고 한다. 공유해 본다.
(1)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다시 한 번 이야기 해 주세요." 내가 진짜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다. 어떤 결론을 내거나, 의사결정을 내리기 전, 우리는 반드시 "잠깐 뭐라고?" 물어야 한다. 부처님도 제자들과 대화를 할 때, 늘 되물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뜻으로 말한 건가요?" 오해하지 않으려고, 되묻는 것이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이나 가족들과 대화할 때 중요한 질문이다. 좋은 소통을 위해 혹인하는 질문이다. "이게 그런 말 맞나요? 다시 한번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시 겠어요?"라고도 할 수 있다.  
(2) "그게 무슨 뜻이지요?" "핵심이 무엇지요?" "왜 그렇지요?" 궁금한 걸 묻는 질문이다. 이 중에서, 누군가의 강의를 듣고 명확하지 않을 때, 누군가 자기주장을 길에 늘어놓을 때, '핵심이 뭔가?" 질문한다. 그럼 생각이 정리된다.
(3) "나라면 어떻게 할까?" 일상에서 무너가 일이 생길 때마다 비난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나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질문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배우는 게 많다.
(4) "얻는 것과 잃는 건 무엇일까?" 나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라는 말을 좋아한다. 인간가 새옹지마(塞翁之馬)이다. 이 질문은 뭔가 결정을 해야 할 때 효과적이다. 행운을 얻었을 때, '이 일로 잃게 되는 것은 없을까' 질문을 해보고, 힘든 일이 생긴 사람에게는 '이 사건으로 얻는 건 없을까'란 질문을 던져 본다. 이런 식으로 반대 질문을 던지다 보면 이외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5)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일까?" "이 일을 왜 해야 할까?" 목적과 의미를 묻는 질문이다. 그리고 이건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내 인생의 참된 가치는 어디 있는지를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 일을 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질문을 통해 문제를 재정의하자고 한다.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그 일의 정확한 뜻을 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요즘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이 많다. 남에 인정받기 위해 SNS에 사진과 글을 올리는 데 몰두하기도 하고,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시도 때도 없이 누리기도 한다. (…) 인정(認定)의 앞 글자인 알 인(認)자를 파자(破字) 하면 '말씀 언(言)' 더하기 '참을 인(忍) '이다." 그러니까 인정의 인자는 말을 참으라는 뜻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상대 이야기를 들으라는 것이다. 그럼 그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안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인정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정이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다. 나를 감추고 다른 사람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질문의 힘은 개념의 정의를 다시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내린 정의가 아니라, 나만의 정의를 확실히 하는 것이다. 질문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켜준다.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 물어야 한다. 요즈음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두꺼운 철문이 내려져 있다. 웬만해서는 이 철문이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철문을 열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어한다. 다만 자신이 먼저 문을 열지는 않는다. 이 문을 여는 최선의 방법은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저는 당신에게 관심이 있답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일은 낯선 상대에게만 통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끼리 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문을 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질문은 최고의 사교 도구이다. 그러려면 말문을 여는 질문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넘기는 것이다. 내 이야기보다는 상대로 하여금 대화의 주도권을 쥐게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대화의 분위기를 만드는 핵심 기술이다.

저자는 누군가를 만날 때 목적성을 없애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 이 사람을 만나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그냥 순수하게 이 사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 첫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사말이다. 그 사람의 강점이나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에 대한 코멘트를 한다. 그 다음 필요한 것은 잡답이다. 영어로는 이걸 '스몰 토크(small talk)'라고 한다. 처음부터 너무 딱딱한 이야기, 용건부터 꺼내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다. 목적은 어색한 긴장감을 없애고 친숙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이다. 저자는 잡답을 잘 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좋은 질문을 던지고, 상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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