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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판단을 유보하고 삶이 흘러가는 것을 관찰하며, 결과보다는 과정에 관심을 두며 사는 것이 괜찮은 삶이다.

270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5월 4일)

몇 일전 단체 카톡에서 흥미로운 박완서 소설가의 글을 받았다. 그 글은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일이 새삼 감사한 일임을 깨우쳐 주었다.  소설가의 주장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어 다닌다면, 우리의 몸 값은 51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51억원의 재산(財産)을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거다. 왜냐하면, 우리가 병원에서 안구(眼球) 하나 구입(購入)하려면 1억(億)이 든다고 한다. 그러니까 눈 두개를 갈아 끼우려면 2억이 들고,  신장(腎臟) 바꾸는 데는  3천만(千萬)원, 심장 바꾸는 데는 5억원, 간(肝) 이식(移植) 하는 데는 7천만원, 팔다리가 없어 의수(義手)와 의족(義足)을 끼워 넣으려면 더 많은 돈이 든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건강(健康)하게 걸어 다니는 우리는 몸에 51억원이 넘는 재산을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거다. 도로를 달리는 어떤 자동차보다 비싼 훌륭한 두발 자가용을 가지고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는 기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로 앰뷸런스에 실려 갈 때, 산소호흡기를 쓰면 한 시간에 36만원을 내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눈, 코, 입 다 가지고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면서 공기를 공짜로 마시고 있다면 하루에 860만원씩 버는 셈이다. 일상의 기적이란 그런 사소하지만, 정말 소중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건강이다. 숨쉴 수 있는 기쁨에 감사하며, 두발로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51억원짜리 몸으로 하루 860만원씩 벌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늘도 나의 채소밭에 걸어 갈 수 있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평범함 속에 감사함을 우리는 잊고 산다. 

이 번주에는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라는 책을 읽고 있다. 그녀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거다. 그런 삶의 아름다움은 판단을 유보하고 삶이 흘러가는 것을 관찰하며, 결과보다는 과정에 관심을 두며 사는 것이라 한다.

판단을 유보하고, 자세하게 관찰하면, 다음과 같은 시가 나온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한 곳에 시선을 머무르게 하여야 시가 나온다. 그래 프랑스 천재 시인 랭보는 시인을 '견자(見者, voyant)'라 했다.


섬/함민복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기존의 이해를 근거로 판단하면 울타리는 높은 것이고 길을 막는 것이다. 관찰의 힘이다. 미리 판단하여 시선을 거두어 들이지 않고 섬에 직접 오래 머물게 한 시인의 노고를 통하여 우리는 가장 낮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길이 되어 버리는 울타리를 두른 새로운 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게 시인의 힘인데, 오랜 관찰의 결과이다. 새로운 섬이 등장한 것이다. 이게 '보는 사람' 견자, 시인의 힘이다.

없던 진실을 있게 만드는 일, 이것이 창조이다. 창조는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집요한 보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열리는 새로운 빛이다. 그래 우린 가끔씩 판단 중지를 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오랫동안 관찰할 필요가 있다. 창조자는 빌려 쓰거나 따라 하지 않는다. 이게 인문정신에서 나온다. 이젠 새로워지는 일을 하려면 우선 집요하게 보아야 한다. 거기다, 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지배하고 있는 구태의연한 선입견으로 채워진 자신이 허물어져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허심(虛心) 또는 무심(無心)이라 한다. 장자 식으로 말하면, 심재(心齋), 마음 굶기기라 한다. 종합해서 말하면, 새로워지려면 볼 수 있고, 볼 수 있으면 새로워 진다. 보는 능력이 중요하다. 이를 '안목(眼目)'이라고, 또 '시선의 높이'라고 한다.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을 위해서는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과학은 인간들을 위해 놀라운 일을 해 왔지만 그건 현상의 한 면일 뿐이다. 과학은 쪼갠다. 지능은 대상을 분해한다. 반면에 마음은 대상을 한데 합친다. 마음으로 공감하면 큰 그림이 보이고 가깝게 느껴진다.  마음으로 관심을 쏟으면 즉시 대상과 연결된다. 만물은 연결되어 있다. 무언가를 쪼갤수록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잠시 삶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을 멈추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마음의 평화는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해 하고 집중할 때 온다. 그리고 판단중지를 한다. "인간이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은, 동일한 정황에서 누구나가 다 동일한 해석, 결정,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의 얼굴과 목소리가 다르듯,  우리 각자는 다른 해석과 결정을 내린다. 그렇기에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등의 표현으로 한 고유한 존재가 내린 결정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자의적 판단/심판을 중지하는 것[은] 인간됨의 실천이다."(강남순)

누구나 좋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나날이 충만하고 순간순간 충실한 삶, 하루하루 들어가는 나이가 몰락의 과정이 아니라 완성으로 나아가는 여정인 삶이 야말로 우리가 이룩하고 싶은 위대한 성취일 테다. <<모든 삶은 충분해야 한다(안타레스 펴냄)>>에서 아브람 알퍼트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는 위대한 삶이 아니라 충분한 삶을 추구할 때, 우리 삶은 좋아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위대한 삶'이란 더 많은 부와 명성을 누리려고 남들과 발버둥 치는 삶을 말하고, '충분한 삶'이란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하면서 적당한 여유와 윤택에 만족하는 삶을 뜻한다. 위대함을 바라고 완벽함을 좇기보다 적절함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비로소 행복에 이른다는 거다.

요즈음 나의 화두가 "평범하고 그만하면 괜찮은 삶"이다. '충분한 삶'이 아닐까? 충분한 삶은 개인의 물질적 안온함이나 정신적 만족에서 그치지 않는다.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말하는 소속감, 즉 "지속적이고 긍정적이며 중요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려는 보편적 욕구"의 충족도 필요하다. 완벽함을 추구하고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기르기보다 서로 존중하고 상호 의존할 수 있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그들과 넉넉히 시간을 함께 보낼 때 삶은 충분해진다. 나아가 충분한 삶은 좋은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불공정과 부정의로 뒤틀린 사회, 불평등을 양산하는 승자 독식 경제, 환경 파괴로 팬데믹과 기후 재앙이 수시로 일어나는 세상에선 누구도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한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평등하고 평화롭고 생태적인 사회를 이룰 때 삶은 충분할 수 있다. 무한 풍요가 아니라 적절함 속에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아닐까? 이 '충분한 삶'에 대한 아이디어는 편집문화실험실 장은수 대표의 글에서 얻은 것이다.

충분한 삶에 대한 나의 원칙은 '얻고자 한다면 먼저 버려라'이다. 수많은 결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철수하는 결단이다. 버리면 정말로 필요한 것에만 집중 할 수 있다. 그러나  '노'라고 말하려면, 자신감과 비전 그리고 집념이 필요하다. 내가 늘 지침으로 가지고 있는 문장이다. "빈방에 빛이 들면(虛室生白, 허실생백), 좋은 징조가 깃든다(吉祥止止, 길상지지), 마음이 그칠 곳에 그치지 못하면(不止, 부지) 앉아서 달리는(坐馳, 좌치) 꼴이 된다."(<<장자>>, <인간세>) 빈방에 빛이 드는 것처럼, 마음을 비웠을 때 새롭게 채울 여지가 생긴다. 중요한 건 멈춤이다. 물리적인 멈춤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멈춤도 필요하다. 멈추지 않고 달리면, 앉아서 달리는 꼴이 된다. 앉아서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그냥 마음만 바쁘지 백날 가도 제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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