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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주도권이 “우리”에서 “나”로 넘어갈 때, 노자가 있다.

7년 전 오늘 글이에요.

주도권이 “우리”에서 “나”로 넘어갈 때, 노자가 있다.

공자가 인간을 “인”(仁)이라고 하는 본질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면서 그의 철학 체계는 이미 근대성을 대표로 보여줄 준비를 마쳤다.

공자에게서 본질로서의 “인”은 잘 보존되고 키워져할 대상이다. “인”이 확장된 최종적인 단계를 그는 “예”(禮)라고 말한다. 근대주의에서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보편적인 이념이다.

그래서 그는 “예에 맞지 않으면 보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듣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말하지도 말고, 예에 맞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말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공자의 철학을 한마디로 개괄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한 주자의 말은 매우 정확해진다. 여기서 “기”(己)는 개별적이고 경험적이며 구체적인 활동을 하는 일상적인 자아다.

“예”(禮)는 보편적이며 집단적이고 이념적인 기준이자 체계이다. 그래서 공자의 철학에서는 일상을 영위하는 경험적이고 개별적인 자아는 부단한 학습의 과정을 거쳐 보편적인 이념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어야 성숙이 완료된다. 여기서는 “나”보다는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다.

노자는 이와 다르다. 보편적인 이념이라는 것은 비록 그것이 “선”으로 채워져 있다 하더라도 “이상”(理想)의 지위를 차지하는 한 “기준”으로 행사된다.

기준으로 작용하면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기능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분과 배제 그리고 억압의 기능은 폭력을 잉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준으로 행사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이념의 단계를 최대한 약화시켜야 한다고 본다. 이것을 그는 “거피취차”(去彼取此)라고 표현한다. 즉 “예”처럼 저 멀리 걸려 있는 이념을 버리고, 바로 지금 여기 있는 구체적 “나”(己)의 일상을 중시하라는 말이다.

“극기복례”와는 정반대이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우리”보다는 “나”에게 있게 된다. 보편적 이념의 지배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성에 의존하자는 것이다.

서강대 최진석 교수의 책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에서 얻어온 생각들이다.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에 대해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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