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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대전문화연대 8월 테마 걷기 늦은 후기

6년 전 이야기입니다.

벌써 9월 테마 걷기까지 했는데, 후기가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뱀 이야기'를 쓰려다 늦어졌다.

매년 대전문화연대 8월 테마걷기는 더위를 피해 오후 늦게 만나 저녁에 걷기를 했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무더위가 심하고 오랫동안 계속되어, 멀리가지 않고, 숲과 그늘이 있는 근처를 걷기로 했다. 그래서 정한 곳이 대전 월평공원 길이었다. 우리는 오후 4시에 대전 내동에 있는 사이클 경기장 주차장에서 만났다. 그 곳에는 국궁장과 양궁장이 또한 있었다. 연휴에 더위가 심한 탓인지, 참석 인원은 많지 않았다. 김교수님, 목계 나, 마지막 참여하시기로 한 은난초님(서울로 이사가신단다.), 긴강님 그리고 우경님 이렇게 5명이었다.

이 월평공원은 대전의 갑천과 유등천 사이에 있는 도솔산과 그 인근에 있는 공원이다. 대전시 내동과 월평동을 아우른다. 이 공원 밑자락에서 흐르는 갑천은 잘 보존된 습지 생태계를 가지고 있고, 도솔산은 육상 생태계 지역으로 소나무가 많고 꼬불꼬불한 길이 사방팔당으로 나 있다. 우리는 이 공원을 지난 7월에 테마 걷기로 걸으면서, 코스를 달리하여 8월에도 걷기로 약속했었다.

올해는 어느 해보다 더위가 계속 지속되어 모두들 지쳐있었는데, 공원의 숲길을 걸으며, 우리는 그 지친 심신을 좀 회복했다. 이리 저리 정해진 코스가 아닌, 발 길 닿는대로 약 3 시간을 걷고 내려왔다. 걷는 도중 말복 이야기가 나와 땀으로 지친 몸을 보신하자고 뜻이 맞아, 그 자리에서 능이 오리백숙 요리를 예약하고 내려왔다. 마침 서울로 이사가신다고 마지막 걷기에 나오신 은난초님의 고별모임을 하기로 해서 어떤 식사를 함께 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은남초님이 가져오신 매실주와 또 다른 술(홈 메이드)을 마시기로 했다.

"1능이, 2송이, 3표구"란 말이 있다.버섯 중에는 능이가 최고라는 말이다. 그 능이를 넣은 오리 백숙에 집에서 담근 술을 실컷 먹고 마신 후, 우리는 <뱅샾62>로 와서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을 마시며, 은남초님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월평공원을 걷다가, 뱀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뱀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데,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뱀이 우리와 다르게 소개된다. 그 이야기를 길지만 소개하고, 후기를 마친다.

고대인들에게 반복되는 자연현상은 단순하게 비쳐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서쪽으로 지는 해가 다음 날 동쪽에서 다시 떠오는 일, 조금씩 기울었던 달이 한 달 만에 다시 차오르는 것, 추운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이 오고 마른 잎이 떨어진 황량한 나뭇가지에서 파릇파릇한 새잎이 돋아나는 일들이 그들의 눈에는 신비스러웠다. 그리고 고대인들에게 동물의 겨울잠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비로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예컨대, 뱀의 동면이나 허물벗기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사물이나 현상은 풀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무한한 생명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런 의미에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뱀이 여러 번 등장한다. 첫째는 올림포스의 도사 테이레시아스의 이야기에서 뱀이 등장한다. 테이레시아스가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말하자면 사랑에 빠져 있는 한 쌍의 뱀을 본다. 물론이 장님이 되기 전이다. 그런데 테이레시아스는 이걸 보고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지팡이로 둘을 떼놓았다. 그 순간 테이레시아스는 여성이 되어버린다. 그는 여성인 채로 7년을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숲길을 걷다가 서로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한 쌍의 뱀을 또 본다. 여성인 테이레시아스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또 지팡이로 둘을 갈라놓는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남성으로 되돌아온다. 양성을 다 경험한다. 테이레시아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도사이다. 그는 육안을 잃은 장님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는 마음의 눈, 심안을 얻은 것이다. 그가 예언 능력의 스토리를 이루는 것은 3번 나온다. 첫 번째가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으로 그 아들 오이디푸스를 지목한 경우, 둘째는 나르키소스를 보고, 저 자신을 알게 되면,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고 예언한 경우, 세 번째는 이승을 떠난 뒤에 저승으로 찾아간 오디세우스의 미래를 예언해준다. 그가 눈이 멀게 되고, 이런 심안, 마음의 눈을 얻게 된 내력은 이렇다. 올림포스 산에서 어느 날 제우스는, 사랑에 빠지면 남자가 더 좋아한다느니 여자가 더 좋아한다느니 하는 문제를 놓고 아내 헤라와 가벼운 입씨름을 한다. “사랑으로 이득을 보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거요. 여자 쪽에서 보는 재미가 나을 테니까.” 제우스의 주장에, 헤라는 여자가 좋아하는 게 아니고 남자가 더 좋아한다고 우겼다. 제우스는 여자가 되어 본 적이 없고, 헤라는 남자가 되어 본 적 없으니 당연하다. 그 때 “그럼 테이레시아스에게 물어보자”라고 하였다. 그 때 테이레시아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남자는 사랑하되 그 마음으로 기다렸던 기쁨의 열 몫 중 하나밖에는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미 마음의 기쁨이 되니 열 몫을 다 누리는 것이지요.” 즉 사랑에 빠지면, 여자가 아홉 배쯤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왜 그런지 솔직히 잘 모른다. 그러자 헤라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테이레시아스를 장님으로 만들었다. 제우스가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서는 한 신이 매긴 죗값을 다른 신이 벗길 수 는 없다. 그래서 제우스는, 보는 능력을 빼앗긴 테이레시아스에게 대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주었다. 다시 말해 육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대신에 심안(마음의 눈)을 얻게 된 것이다. 재미나지 않습니까? 눈을 감음으로써, 즉 현상을 보고 있지 않아야 직관이 생긴다는 뜻이다. 즉 눈은 보이지 않아도 직관만 있으면 사물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여성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여성들은 자신의 남성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면, 우리 자신에 관한 한, 신들이 아는 수준, 혹은 신들이 말하는 수준 이상의 수준으로 알기까지 이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신화학자 노스승 조셉 캠벨은 결혼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그런 수준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이성(異性)의 측면과의 만남이다.”(<신화의 힘>, p 368). 테이레시아스가 인간의 미래를 훤히 꿰뚫어볼 수 있는 것은 양성인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테이레시아스가 육안을 잃고 장님이 되는 대신 심안, 마음의 눈을 얻어 앞일을 헤아리게 된 사연의 또 다른 버전이 있다. 테이레시아스가 숲 속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아테나 여신의 알몸을 훔쳐보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신들의 세계를 기웃거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테이레시아스의 눈을 쓰다듬었는데, 그 때부터 테이레시아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신은 장님이 된 테이레시아스가 측은했던지 다른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는 육신의 눈을 잃는 대신 마음의 눈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아테나 여신에게 드린 감사의 기도는 우리에게 살아가면서 감사해야 할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를 느끼게 한다. “영원한 파르테노스(성 처녀)시여. 한 손으로는 치시되, 한 손으로는 거두시니 감사합니다. 겉 보는 것을 거두어가시고 속 헤아리는 권능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육신의 눈동자보다 더 큰, 그리고 더 깊은 눈동자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잃고도 얻는 것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테이레시아스는 ‘징조를 미리 읽는 자’, ‘선견자’, 즉 ‘미리 아는 자’라는 뜻이다. 그가 한 예언들은 신화의 곳곳에서 나온다. 나르키소스의 손을 한 번 만져보고는, “네가 너를 아는 날이 네가 죽는 날”이라고 예언 했고,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와 그의 아들 오이디푸스의 앞일을 예언했던 자이다. 그리고 뒷날 아르고 원정대가 테바이에서 만나게 되는 예언자, 저승에서 오디세우스에게 귀향길을 일러준 예언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들고 다니는 지팡이에 한 마리의 뱀이 휘감고 올라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의학과 관련된 세계 여러 나라의 기구나 단체를 상징하는 휘장으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정도였다. 어느 날 이미 숨이 끊어져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아스클레피오스는 한숨을 쉬다가 기어가는 한 마리의 뱀을 보았다. 그는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뱀을 내리쳐 죽였다. 그러자 잠시 후 또 다른 한 마리의 뱀이 나타났다. 그 뱀은 이상한 풀을 물고 와서는 죽은 뱀의 입에 갖다 대자, 희한하게도 죽은 뱀이 다시 살아났다. 아스클레피오스가 그 풀을 죽은 사람의 입에 물려보았더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의 지팡이(카드케우스라고 한다.)에는 두 마리의 뱀이 얽혀 올라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스크레피오스에게 뱀은 생명의 끈을 이어주는 상징이고, 헤르메스의 뱀은 무언가를 연결하고 매개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것이 헤르메스의 임무이다. 모든 이어짐이 길다란 이미지의 뱀으로 상징화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에게 뱀은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는다. 음습한 곳에 살뿐만 아니라 가까이 하기에 좀 징그럽다. 우리 조상들은 뱀을 죽은 사람의 환생으로 보아, 집에 찾아드는 구렁이를 죽이지 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