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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퍼빙(phubbing)'이란?

정말 속절없이 시간이 흐른다. 코로나-19 확진자를 알리는 문자와 안전 안내 문자만 수시로 받다가 9월도 다 지나간다. 그래tj 나는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이 제안한 "책 읽고 건너가기"의 9월 책 까뮈의 『페스트』를 오늘 다 읽을 작정이다. 나는 대학 시절에 까뮈의 『이방인』을 읽고 흥분했었다. 아마 그 사건때문에 나중에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어제는 "책 읽고 넘어가기"(우리마을 10대학 주관)에서 코로나-19의 팬데믹 이후의 세상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마치 페스트 전염병으로 중세가 문을 닫고 르네상스가 시작된 사건을 나는 거의 30분 이상을 설명했다.

최진석 교수는 까뮈의 『페스트』를 "역사적 사실을 철학의 높이에서 포착하여 문학적으로 정련한 글"이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철학적 높이"에 방점을 찍는다. 우리가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들이 그 높이가 없다. 내 주변 사람들은 사유를 하지 않는다. 그건 할 말이, 즉 자신의 견해가 없거나 사유의 시선이 낮기 때문이다. 대화를 잘 하지 않는다. 그저 스마트폰에 집중한다. 언젠가 소설가 백영옥은 심리학자 셰리 터클의 『대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에 나오는 '퍼빙(phubbing)'이란 말을 소개한 적이 있다. 휴대폰의 '폰(phone)'과 '무시함'의 '스너빙(snubbing)'을 합성한 말로, 주변 사람들에게 냉담할 정도로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태도를 뜻하는 신조어다. 연애를 하는데 더 외롭다는 얘길 듣곤 한다. 연인의 대화가 둘만의 것이 아닌 넷 혹은 그 이상의 형태로 분절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카페에 마주앉아 대화하는 커플 중 절반은 상대 얼굴이 아니라 각자의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흘렀다. 그래도 한 마디 더 해본다. 내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도, 요즈음의 젊은이들처럼, 대면이나 전화를 직접 하는 것보다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대화를 한다. 대면보다 온라인 의사소통을 선호하는 요즘 현상과 관련이 깊다. 온라인 의사소통은 자신을 더 잘 통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편집과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상태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상태'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마주 앉은 사람은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지만 컴퓨터는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 교제는 '우정을 요구하지 않는 우정'이라는 말만큼이나 모순적이다. 인간관계는 관심을 쏟고 처지를 바꿔 생각해야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대화를 잃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책이나 좀 긴 글들을 읽지 않고, 또 쓰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배철현 교수는 "교육의 내용은 생각하기(思), 말하기(言), 읽기(讀) 그리고 쓰기(作文)"라고 말하며,  "이 네 가지 중 우선 순위를 정하자면, 읽기와 쓰기가 우선"이라고 했다. 언뜻 보면, 인간은 생각하기와 말하기를 아무런 노력 없이 저절로 터득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하기와 말하기는 그 인간의 수준을 결정한다. 높이가 다르다는 말이다. "생각하기와 말하기는, 저절로 터득 되는 기술 같지만, 실제로는 오랜 기간의 수련을 거쳐야만 획득되는 궁극의 무기이다."(배철현) 읽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다가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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