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제주 송악산 해안을 걸었다.

원래 지구는 들끓는 불덩어리였는데, 지구 내부에서 빠져나온 기체들이 대기와 구름이 되고 마침내 큰비가 만들어져 바다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식어가는 마그마 위에 형성된 바다는 처음에는 뜨겁다가 차츰 따뜻한 물로 변해 거기에서 생명 탄생의 화학 반응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불이 물로 변한 것이데, 불과 물의 싸움에서 불이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물은 단지 지구 표면만 식혔을 뿐, 땅 속에서 아직도 섭씨 2천 도의 마그마가 펄펄 끓고 있다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제주도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난 아픔을 품고 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현장들이 있다. 그래 송악산 올레 10길을 걸은 다음, 모슬포 섯알오름에 갔다. 그 길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었다. 1950년 뜨거운 여름날,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이유 없이 죽어간 원혼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너무 하늘이 맑아서 더 서러웠다.

그리고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들이 산방산을 등지고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초라하게 여기 저기 눈에 들어 왔다. 이 비행장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대정읍 상모리 아래쪽 너른 벌판에 제주도민 등을 동원하여 건설한 군용비행장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 비행장을 전초 기지로 삼아 약 700km 떨어진 중국의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오무라 해군 항공대의 많은 전투기를 '알뜨르'에서 출격시켰다. 그러나 1938년 1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오무라 해군항공대는 중국 본토로 옮겨졌고, '알뜨르 비행장'은 연습 비행장으로 남았다.  '알뜨르비행장'은 '마을 아래에 있는 너른 들팜'의 뜻을 갖고 있는 상모리 '알뜨르'에 조성되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 옛 활주로 터를 따라 '예비검속자'들이 집단 학살된 처절한 현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준비 없이 맞이한 죽음 앞에 공포에 떠는 눈빛으로 서있는 열 일곱 소년의 맨발이 오버랩 되었다. 총을 겨눈 이도, 꽃다운 나이를 탄약고 터에 묻어버린 맨발의 소년도, 그저 동네 아저씨요 이웃집 아이였을 그들의 슬픈 눈빛이 진 녹색 웅덩이에 박혀 있다. 이름 짓지 못한 역사, 제주 4.3사건 218명의 희생자(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확인한 희생자 수)를 낸 제주예비검속 섯알오름사건을 말하기 전, 먼저 제주4.3사건을 들 여다 보아야한다.

오늘 사진은 대학살을 감행한 후, 증거인멸을 위해 유품들을 불태웠던 장소에 세워진 조각상의 일부이다. 예비검속 구금 장소는 협소했다. "넓은 장소로 간다"고 유인하여 희생자들은 생활 소지품들을 모두 트럭에 실었다.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칠월 칠석일) 새벽 트럭에 실려가며 고향마을 을 벗어나 이곳 길을 향했을 때, 그제서야 자신들의 죽음을 예측 했었는지 신었던 검은 고무신들을 벗어 던지며 가는 길을 가족에게 알리려 했었다. 길 위에 검은 고무신들을 따라 유족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 곳에서 담요, 베개, 옷가지, 허리띠, 쌀, 부식 등 희생자들의 소지품이 모두 불에 타고 있었다. 그 날의 역사적 사실을 자각함은 희생자의 원혼을 추모하는 일로서, 당시에 남편 찾아 달려와 현장을 목격했던 이상숙(1925년 생) 여사가 일금 4,500만원을 지원하여 재현된 시설물의 일부이다.

우리 역사는 왜 제주도민 3만 여명의 희생을 요구했는지, 제주도가 왜 좌익의 상징 ‘빨간 섬’으로 낙인 찍혀야 했는지를 이제는 말해야 한다. 제주4.3사건은 70년 이상의 세월을 뒤로하지만 여전히 제주도민들의 마음엔 한(恨)으로 서려 있다. 당시 어린 나이였던 희생자 가족들은 이미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날의 공포와 참혹한 기억에 갇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눈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슬픔 그 이상의 상처가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며 용서할 수 없는 증오로 아물어 가는 것이다. 곪은 상태로 아문 상처는 다시 들여다보고 치료해야 한다.

제주 4.3사건의 진실 속을 몇 일동안 들여다볼 생각이다.  사건의 배경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사건의 뿌리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직후 불어 닥친 복잡미묘한 정국(政局)에서 찾아야한다. 1945년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본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감격의 날이다. 일본제국의 억압을 피해 고국을 떠났던 이들이 해방의 기쁨과 삶의 희망을 안고 하나 둘 돌아왔다.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돈 벌러 일본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귀향하면서 당시 20만 남짓이었던 제주 주민이 무려 6만 명이 더 늘어났다. 갑자기 늘어난 인구에 일자리가 부족했고, 콜레라에 흉년까지 겹치면서 먹고사는 게 갈수록 피폐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제강점기에 부와 명예를 누렸던 일제 부역자들이 그대로 미국 군사정부(미군정) 하에 앉아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사회는 점점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일제 부역자들이 미군정 하에서 다시 관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명분으로 미군정이 과거 일제통치기관에서 일했던 관료들을 대거 등용했기 때문이다. 해방은 되었지만 온전한 해방이 아닌 것이다. 38도선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통치함으로써 독립국가로서의 위치에 설 수 없었다. 이에 자주적이며 통일된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열망으로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됐다. '건국준비위원회'는 곧이어 ‘인민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당시 ‘인민'이라는 용어는 국민, 시민보다 더 흔하게 쓰였다. 그러나 미군은 인민위원회에서 만든 우리의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로지 ‘미군정'만을 이남의 합법정부라 선포하고, 자신의 통치를 위해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시켜야 했다. 이때 미군정은 일제 부역자들을 자신의 손발로 활용한 것이다. 필연적으로 갈등이 뒤따랐다.  

제주에서도 대정면(지금은 대정읍, 그 동네에 있는 산방산 아래에서 이 글을 쓴다)을 시작으로 1945년 9월 10일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이어 9월 23일 제주도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제주도인민위원회의 역할은 주로 치안활동과 교육사업, 그리고 마을의 행정을 주도했다. 미군정의 탄압으로 다른 지역의 인민위원회가 소멸되거나 이름을 바꿀 때에도, 계급대립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촌락공동체가 강하게 뿌리내려 자치 조직으로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제주도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일제 부역자 등 우익인사들을 조직화 시켜 인민위원회를 대항할 세력을 키워갔다.

그리고 1946년 8월 1일 우익세력이 주장해온 제주도(島)의 도(道) 승격이 실현됨으로써 우익의 입지가 강화됐다. 이때부터 도(道) 규모에 맞는 경찰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대9연대가 창설되는 등 공권력이 강화됐다. 마침내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직접 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미군정과 인민위원회의 대립, 앞서 말한 피폐한 경제상황이 겹쳐 도민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제주 4,3 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념이라는 굴레 속에 세계 냉전 구도가 빚어낸 엄청난 비극이었다.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지나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됨에 따라 4.3사건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까지 긴 여정이 필요했다. 이유는 우리 사회 기득권 세력이 이 사건에 직‧간접으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몰락하자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하지만 다음해에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로 다시 중단됐고, 이후 20여 년간의 군사정권 하에서 4.3사건에 대한 논의가 금기시됐다. 반공법, 국가보안법, 연좌제 등이 서슬 시퍼렇게 자리한 그 당시에는 발설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다 1978년 현기영의 ‘순이삼촌’이라는 소설을 통해 잊히던 4.3사건이 대중의 관심 속에 들어왔다. 소설가 현기영은 이 작품으로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참담한 역사 4.3사건이 1987년 6월항쟁 민주화 열기와 함께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9년 4월 3일 제주시민회관에서 첫 공개 추모행사가 열렸고, 이후 2000년에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된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4.3사건의 본질을 명확히 했으며, 4.3유족과 제주도민을 짓눌러왔던 이념적 멍에를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 제주도가 인권의 상징이자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역사적 아픔을 딛고 진실과 화해의 과정을 극복해가는 제주도는 2005년 1월 27일 ‘세계평화의 섬’으로 거듭났다.

송악산 해안을 걸었다. 두 개로 나뉜 바위를 감싸고 있는 바다가 평온했다. 거센 물결은 심연에 가두고 푸르디푸른 하늘을 머금은 저 바다와 참혹함을 진흙 속에 묻고 마르지 않는 진 녹색 눈물을 보이는 섯알오름의 학살 터 웅덩이가 닮은 듯하다. 제주의 거센 바람 속에 척박한 농토를 함께 일구며 소소한 밥상을 나눈 이웃들이 어느 날 무장대와 토벌대로 만나 서로에게 광기어린 총칼을 휘둘렀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은 없었다. 그저 나의 부모, 형제자매가 무참히 학살당하는 처참한 슬픔만이 가슴에 남았다. 무차별 쏘아 대는 총과 미친 듯 휘둘러 대던 창과 칼은 슬픔에 대한 분노이자 한 서린 복수였다. 이들의 절절한 분노와 슬픔을 짓밟고 외면하면서 국가는 이념정치라는 허울로 군림했다. 이게 바로 70년이더 지난 제주4.3사건의 본모습이다. 그러나 70년 이상의 세월은 제주도민을 성숙하게 했다. 죽일 만큼의 미움도 죽을 만큼의 슬픔도 용서와 화해로 녹여냈다.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서있는 저기 저 두 개의 바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제주바다를 지켜내고 있었다. <투데이 신문> 박애경 발행인의 글, <제주 4.3사건, 엉킨 실타래로 평화의 옷을 짓다>에서 많은 정보를 얻었음을 밝힌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복합와인문화공방_뱅샾62 #제주_4_3_사건 #섯알오름 #알뜨르비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