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샤워실의 바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아름다운 것은 똑같아지는 게 아니라 개성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남의 흉내를 내고, 남의 눈을 위해서 희생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찾아 낸 것이 아니라 남의 눈으로 본 세상을 자기 것으로 고집하는 것은 비극이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보다 성숙한 모습을 추구하는 미완의 존재이다.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하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지난 주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일주일 내내 비가 왔다. 지금도 밖은 비가 굵게 내린다. 걱정이다. 나의 만트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도 마음의 힘이 되지 못한다. 이러다 온통 홍수로 다 물에 잠기는 것 아닌가 걱정이다. 기상 전문가들에 의하면, 올해처럼 길고 긴 장마는 기후변화 탓이라고 한다. 시베리아의 이상 고온 현상으로 뜨거워진 공기가 상승해 동시베리아의 대기 흐름을 막고, 이런 가운데 북극 기온 상승으로 극지방 주변 제트기류가 약화되면서 북극의 찬 공기가 남하해 북태평양 고기압의 북상을 저지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니까 올 장마는 북쪽에서 내려온 찬 공기가 북태평양 고기압의 더운 공기와 부딪히면서 많은 비를 뿌리는 것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앞으로 기후변화에 따른 기상 이변이 더 자주, 더 큰 규모로 발생할 것라는 데 큰 걱정이다. 이제 정말 일상에서 지구를 지키는 일에 더 많이 신경써야 한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긴 장마만큼, 우리 사회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부동산 정책 이야기이다. 원론적으로 말하면, 부동산보다 땀 흘려 번 돈이 우대받아야 하는 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일자리가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일자리가 있더라도 근로소득을 올려 확대되는 소득양극화에 정면으로 맞서기는 불가항력이라고 보고 너도 나도 부동산에 뛰어든다. 현대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제시하고 있는 일자리를 통한 복지국가, 즉 완전고용 목표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일자리가 아닌 자산소득 확보가 더 중요한 생존게임이 되었다. 부자는 건물이나 토지에 투자하고, 서민은 있는 돈을 털어서 사는 집을 통해서라도 자산을 늘리는 게 생존 투쟁 방식이자 재산 증식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한정된 부동산 자산을 가지고 벌이는 생존게임은 결국 승자와 패자를 만들고 자칫 순식간에 거품이 꺼지면서 국가와 개인의 파국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게 문제이다.

현명한 정책을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어제는 소설가  백영옥의 칼럼에서 "샤워실의 바보"라는 말을 배웠다. 이 말은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의 말이라 한다. 섣부른 정책으로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을 '샤워실의 바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샤워기의 적정 온도를 설정하기까지는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 기다리지 못하고 손잡이를 좌우로 힘껏 돌리면 너무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이 반복적으로 나와 원하는 온도로 샤워를 할 수 없다.

최근에 나는 주변에서 부동산 정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많이 듣는데, 전혀 관심 밖이다. 부동산이 없고, 또 부동산을 살 돈도 없지만, 계획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 집값이 몇 억 뛰었다는 소리와 함께 이번 생은 망했다는 소리도 자주 듣는다. 자본주의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애담 스미스가 말했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인간은 '호의를 베푸는 이기주의자'이고, 『국부론』의 시장은 이런 인간들이 뛰노는 곳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는 곳이다. 어제 지인의 페북에서 만난 멋진 표현이 기억난다. 『국부론』의 ‘보이지 않는 손’은 ‘도덕감정이 유지되게 하는 어루만짐’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유 시장주의’는 도덕이 실현되는 세상이다. 도덕 감정이 빠진 시장주의는 '부도덕한' 자본만이 득실거린다. 그리고 『국부론』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기심이라는 표현이 'selfishness(제멋대로임, 이기적임- 남의 이익을 침해해서라도 내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가 아니라, 'self-love(자기애, 자기에 대한 사람)'라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것은 self-love이다. 그 말은 내가 나를 사랑하듯이 남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면 남을 대할 때도 다르다. 남이 내게 손해를 입히면 싫은 것처럼, 나도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 안 된다. 그건 양심이 충고를 하는 소리이다. 요약하면, 애덤 스미스가 전제한 것은 사장에 나온 인간이 selfishness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self-love를 가진 인간이라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는 타인에게 호의를 가진 '자기 사랑'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시장이 속임수가 없는 공정한 가격에 따라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속에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기 때문에 독점도 없고 착취도 없다. 임금이나 이윤이 특정한 사람에게 쏠리는 현상도  제한된다. 그리고 분업으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고, 이것은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만들게 한다. 이것이 애덤 스미스가 찾은 신의 질서의 법칙이다. 이 때 국가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리고 공공기관과 공공사업 운영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그런 신의 질서에 탐욕(selfishness)스런 인간이 나타나 세상을 괴롭힌다. 그래 우리는 뭉쳐 응징하고, 굴복 당하지 말하야 한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고 애덤 스미스를 인뇽한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잘 알고 말해야 한다. 예컨대, 탐욕스런 자들에 의해 애덤 스미스가 경제적인 동물인 이기적인 인간을 창안하고 옹호한 우두머리가 되었다. 신의 질서를 위반하면, 신의 무서운 '벌'을 기다려야 한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인문운동연구소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