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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북쪽 바다에 곤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그 크기는 몇 천리나 된다. 그 물고기가 변해서 붕이라는 새가 된다. 그 새의 날개는 몇 천리가 되는데, 한번 기운(바람)을 떨쳐 날면 날개가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장자>> "소요유")

곤이라는 물고기는 북쪽 바다에 산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북쪽은 대개 좋지 않게 쓰인다. 춥고, 어둡고, 음습하다. 우리가 사는 험한 세상이다. 물고기는 우리 자신이다.  비록 크기가 몇 천리나 되지만 수면 아래에 있어 존재감이 없는, 저마다 알고 보면 너무나 잘났지만 남들은 잘난 줄 몰라주는 그런 존재이다. 그런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된다. 날개가 몇 천리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날개를 펴면 구름처럼 하늘을 가린다. 더 이상 험한 세상에 매이지 않는다. 더 이상 수면 아래에 모습을 감추지도 않는다. 자유롭게, 멋지게, 거칠 것 없이 창공을 가른다. 변신이다. 예전의 모습을 털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난다. 자유란 그렇게 거듭나는 변신이다. 자유는 자신의 '버림'이고, 동시에 자신을 '되찾음'이다.

그러한 변신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바다 기운이 한번 크게 움직일 때"에 변신한다. 때를 틈타 할 수도 있고, 때 덕분에 할 수도 있다. 바다 기운이 계가가 될 수도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다 때가 중요하고, 세상이 무엇 하나 혼자 힘으로만 되는 건 없다. 자기 변신마저도, 모든 게 작용과 반작용이다.

<<장자>>의 "소요유"를 읽다 보면, 붕새는 남쪽으로 "장차 옮겨 가려"할 뿐 도착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남쪽은 하나의 지향점이다. 자유가 그렇다. 하나의 지향일 뿐이다. 삶이 그렇듯 과정이 의미 있는 것이다. 성취라고 생각하면 이미 손 안에는 아무것도 없기 마련이다. 그 과정 속에서 실(實)이 있어야 한다.

지난 주에 읽은 <<장자>>의 "덕충부" 후반에서 노나라의 애공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처음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이 법을 지키게 하고 그들이 죽지 않도록 염려하는 것으로 나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소. 이제 지인(至人)의 말을 들으니, 내겐 임금다운 바탕도 없으면서, 몸을 가볍게 놀려 나라를 마치는 것이 아닌가 두렵소." 원문을 일부 인용하면, "今吾聞至人之言(금오문지인지언) : 이번에 지인의 말을 듣고, 恐吾 無其實(공오무기실) 輕用吾身而亡吾國(경용오신이망오국) : 내게 그런 실력도 없으면서(무실-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 하는 것) 경솔하게 처신하여 드디어는 이 나라를 잃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졌소."

애공은 지금까지 임금이 할 일이란 그저 백성이 법을 지키게 하고 백성이 죽지 않게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하면 도를 따르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공자의 말을 듣고 보니 자기의 왕 노릇이 자기도 망치고 백성도 망치는 일이 아닌가 두려워졌다는 것이다. 이런 두려움, 이런 자각을 갖게 되었다는 자체가 애공이 이미 도의 길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실'이 없이 경솔하게 처신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이런 두려움을 자각해야 한다.  거창한 목적으로 세우고, 그 목적을 향해 '사소한' 것을 희생하기 시작하면, 그건 억압이고 폭력이 된다. 자유는 그냥 자유로움 그 자체이지 무엇을 '위한' 자유란 없다. 우리가 하는 일들도 그렇다. 그 일 자체가 중요하고, 그 일을 위한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래 우리의 삶에서 일상에 충실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중요하는 것은 물고기가 새로 변신하자 마자 곧장 남쪽 바다를 향한 비행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우선 하늘 옾이 날아오르는 게 먼저이다. 변신에는 계기가 있었다. 다른 사람 또는 조건의 도움을 받았다. 그게 의존이다. 그러나 물고기가 새로 변신했더라도 날아오르는 건 새 자신의 문제이다. 새 자신의 힘으로 비상해야 한다. 홀로서기이다.

하늘 높이 오른 새는 시선이 바뀐다. "아지랑이나 티끌은 모두 생물이 불어내는 입김이다. 하늘이 저토록 푸른 것은 하늘의 본래 빛깔인가? 멀고 멀어 끝이 없는 까닭인가? 붕새가 나는 구만리의 상공 저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아도 또한 저러할 뿐이다."(<<장자>>, "소요유")

훈련된 지성적 시선의 높이가 그 사람의 철학 수준이라고 최진석 교수는 주장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 높이에서 작동시킨다. 그 때 작동되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창의력과 상상력 (2) 윤리적 민감성 (3) 예술적인 영감. 인문(人文)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로 인간의 동선(動線)이다. 인문적 활동이란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상상이나 창의는 인문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인문적 시야를 가지려면, 시선의 높이를 상승시켜야 한다. 그건 전략적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하는 일이다. 시선의 높이는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고 최진석 교수는 자주 말한다.

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땅 위의 아웅다웅하는 삶이 쪼잔해 보이고, 큰 틀에서 오히려 쪼잔한 싸움이 두 당사자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여유도 생기고, 혹여 나 자신이 싸움의 당사가 된다면 통 크게 한발 물러설 용기를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더 이상 땅 위의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규칙의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는 '거리두기'라 할 수 있다. 땅 위의 삶을 하늘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거다. 그러다 보면, 내가 옳다고 여겨 온 신념, 나를 가둬온 고정관념을 바로 그런 거리 두기로 깨어 버릴 수 있다.

강상구의 <<그때 나는 장자를 만났다>>를 읽고 얻은 생각들이다. 끝으로 저자 강상구의 말을 직접 들어 본다. "'높이 나는 새'가 별다른 게 아니다. '낮게 나는 보통 새'의 관점에 지배당하지 않는, 다른 시선을 가진 자유로운 새이다." 이쯤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다시 소환하니, 감회가 남다르게 그 묘비명이 더 멋지게 다가온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강상구 저자에 의하면, 이 묘비명은 카잔차키스의 소설 <<신을 구하는 자>>의 일부분이라 한다. 원문은 뒤에 두 문장이 더 있다고 한다. "나는 마음과 가슴, 그 모두로부터 자유롭다. 훨씬 더 높이 올랐기에 나는 자유롭다."

여기서 자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개념에 가깝다. 성인의 경지에 오른 경우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을 보고 비웃는다. "매미와 산까치가 한번 올라 오르면 구만리를 나는 붕새 이야기를 듣고 비웃었다. "우리는 훌쩍 솟아 날아 보아야 나무 덤불에 부딪히거나 그마저 실패해서 땅바닥에 처박히는 데, 무슨 영광 보겠다고 구만리나 날아오르겠다고 하는 거냐?"(<<장자>>, "소요유")

자신들의 삶을 조금 떨어져서 돌아볼 생각이라 고는 전혀 하지 않는, 그저 비루한 일상에 매몰돼 그저 그런 하루가 전부라 고만 생각하는 인생들은 비웃는다. 그들은 도약을 꿈꾸는, 조금 다른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가차 없는 비웃음을 날리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우선 남의 글을 읽지 않는다. 독서 자체를 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일기를 따라 온 사람은 "붕새"가 될 소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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