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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에세이

마음의 안정과 여유

카프카가 그랬다. 평안, 정적, 휴식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 성급함은 인류의 중죄라고 말이다. 우리는 자기 짐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살아간다. 그 짐을 내려 놓으려면 침묵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문제는 소란에 길들여진 영혼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침묵의 길에 들어서려면 세상을 행한 감각의 창문을 모두 닫고, 자신의 내면만을 응시하면서, 어떤 '은밀한 소리'를 들어야 하다. 그 소리를 들으려면 침묵이 필요하다. 숭고한 자신을 찾아가는 순례자에게는 고요와 침묵 그리고 경청이 필요하다.

경계에 서려면, 우리는 고요를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유혹하는 외부의 소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신의 사소한 생각에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건 듣기 위해 침묵을 유지하는 일이다. 사실 듣기와 말하기는 서로 배타적이며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다. 듣기를 수련한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하기에 급급하다. 주의 깊게 들을 수 잇는 사람만이 상대방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경청을 통해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가야 가능하다. 여기서 무아에 방점을 찍는다.

영어로 말하면 타자 중심적 듣기인 'listening' 이다. Listen은 자신이 듣고자 하는 대상 앞에 전치사 to 가 놓인다. 그러므로 '리스닝'은 상대방의 말에 나의 귀를 가져다 대는 노력이 필요하다.말 그 대로 '경청(傾聽)'이 필요하다. 이는 자기 중심적에서 벗어나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과 귀를 쭉 뻗어내려는 수고가 동반되어야 한다. 반면 영어 단어 hearling은 자기 중심적이다. 히어링은 상대방의 말을 흘려 듣는 낮은 수준의 듣기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말만 취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를 헤아릴 수 없다.

오늘 <인문 일기>의 화두인 마음의 안정과 여유는 지금의 자리에서 누려야 한다. 고요는 바깥의 소음과 별 상관이 없다. 세상이 시끄러워서 마음의 아전을 취할 수 없다. 살기에 바빠 여유를 가질 수 없다. 이런 세상 탓은 변명에 불과하다.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 누에는 거친 뽕잎을 먹고도 비단실을 토해 내고, 연못의 연은 흙탕물 속에서 꽃대를 밀어 올린다. 깨끗한 물에서 핀 연꽃은 3-4cm 크기밖에 되지 않지만 진흙탕 물에서 자란 연꽃은 20cm나 된다고 한다. 물이 탁할수록 더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다. 세계일보 배연국 논설위원의 글에서 얻은 것들이다.

"음악이나 별미로는 지나는 사람 잠시 머물게 할 수 있으나 도에 대한 말은 담박(淡泊)하여 별 맛이 없습니다." <<도덕경>> 제35장의 말이다. 그 담박한 도가 아무런 꾸밈이나 장식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통나무’인 것처럼, 우리도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제19장), “완전한 비움에 이르고 참된 고요를 지키는 것”(치허극 수허독, 治虛極 守靜篤)-제16장), 이런 것이 ‘위대한 개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길이다. 더위, 조금만 참으면 된다. 오히려 고요를 즐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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