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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인문 산책

국민을 배신한 충성의 댓가를 제대로 치르게 해야 한다.

7년 전 오늘 글이에요.

박수소리 시대정신

진정한 야망을 품은 집사라면 끊임없이 자신의 주인을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일은, 계단에 구르는 낙엽처럼, 한 순간을 살다 사라질 뿐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야망을 품은 '위대한' 집사라면 주인의 동기를 엄밀嚴密하게 검토하고 그의 견해에 담긴 포괄包括적인 내용들을 분석해야 하며 오직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자신의 기능이 바람직한 목적에 사용되고 있는지 여부與否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은 주인에게 만족을 느끼지 못한 채 무대 뒤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주인을 그처럼 비판적인 태도로 대하면서 훌륭하게 봉사한다는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주인에 대해 자기 나름의 ‘확고한 소신’을 형성하고자 끊임없이 애쓰는 집사의 경우, 훌륭한 전문가의 필수 조건에 속하는 자질, 다시 말해 ‘충성심’면에서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위대한 집사와 유능한 집사와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지각없는 ‘충성심’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위대한' 집사는 무턱대고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에 철저히 반대하는 사람이다.
(* 무턱대고: 헤아려 보지 않고 마구. 덮어놓고.)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가치 있게 살아온 집사라면 한 번은 기회가 찾아온다. “이 주인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고귀함과 존경할 만한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 이제부터 내 한 몸 다 바쳐 이분을 섬기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지적(理智, 이지로 판단·행동하는 (것).)으로’ 부여된 충성심이다. 나는 스르로 이런 판단을 하는 사람을 '위대한 집사'라고 말하고 싶다.  

위의 이야기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탄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에서 읽었던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충성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하면서, 나는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의 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최근에 우리는 '여론 조작'과 '사법 방해'로 소환된 적폐 국정원 간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난 국가에 충성을 다했다." 그는 반역을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죄의식 조차 없다. 그는 충성의 의미를 잘 모른다. 국민을 배신한 충성의 댓가를 제대로 치르게 해야 한다. 또 이런 자들이 국가정보를 관장했으니, 대북 활동이 그리도 지리멸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