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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노자가 꿈꾸는 성인이 일상에서 실천해야 하는 다음 여섯 가지

301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11월 20일)

어제, 노자가 꿈꾸는 성인이 일상에서 실천해야 하는 다음 여섯 가지를 말하였다. 그것들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본다. 여기서 성인은 자연의 운행과 존재 형식을 모델로 삼는 가장 높은 수준의 인격 자이다.
① 無爲之事(무위지사)하고
② 不言之敎(불언지교)하고
③ 萬物作焉而不辭(만물작언이불사)하고
④ 生而不有(생이불유)하고
⑤ 爲而不恃(위이불시)하고
⑥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한다.
 
이를 한국어 말하면, 성인은 
①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②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하고, 
③ 모든 일이 생겨나도 참견하지 아니하고, 
④ 낳으면서 소유하지 않고,
⑤ 할 것 다 되게 하면서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⑥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 

제일 먼저, "무위지사"란 말은 '함이 없는 함'으로 풀어 볼 수 있다. 그래도 '무위'라는 말이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런데 도올 김용옥 교수의 설명이 좋다. "'무위'는 '위(爲, 함)가 부정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의 최대 특징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살아있음은 그 자체로서 위(爲)가 되는 것이기 ㄸ문이다. 즉 무엇인가 행동해야 하는 거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위(爲), 즉 '함(doing)'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무위'라는 것은 '함이 없음'이 아니라. '무(無)적인 함'을 하는 것이다. 생명을 거스르는 '함'이 아닌, 우주 생명과 합치되는 창조적인 '함'이며,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에 어긋나는 망위(妄爲)가 없는 '함'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노자는 우리들에게 "무위지사(함이 없는 함)" 속에서 살라고 권유하는 거다. '무위'에 대비되는 '유위', 즉 '무엇인가 자꾸 억지로 하려 하지 말고, 내버려두면 저절로 풀려나간다'는 거다.

그 다음, 훌륭한 가르침은 '불언(不言)'의 가르침이어야 한다. "교육이란 다양한 각도에서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우며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위대하고 창의적인 모든 결과가 출현한다고 믿는다. 밖에 있는 별을 찾아 밤잠을 자지 않고 노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 혹은 자기에게만 있는 자기만의 고유한 별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최진석 교수의 글에서 읽은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불언지교"이다. 

"불언지교"는 노자의 핵심 사상인 '무위(無爲)'적 행위 가운데 한 유형이기도 하다. '무위'라는 말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가 과하게 느낄 정도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노자는 "무위지사"의 한 짝으로 "불언지교"를 제시한 것이다. 여기서 "무위"와 "불언"은 상통 하는 것이다. 

제1장에서 이미 노자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를 말함으로써 인간의 언어나 개념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이성이나 논리의 허구성도 경계했다. 따라서 그러한 "상도(常道)"에 대한 진실을 확신하는 자는 인생살이에서도 '언(言)'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는 거다. 따라서 가르침도 "언(言)'을 통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 논리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지 않고, 말 없는 솔선수범으로 가르치는 거다. '불언의 가르침'이란 '침묵의 가르침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규정하거나 내용을 정해 주는 가르침을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언지교"가 행해지는 맥락 속에서는 행위자나 피교육자가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등장한다. 책임성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등장한다. 그래야, 우리는 별을 찾아 평생을 헤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별이라는 것을 아는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일의 밑바탕에는 '사랑의 힘'과 믿음, 즉 신뢰가 필요하다. 이 사랑과 신뢰의 힘이 "불언지교"를 행하게 한다. '사랑의 불언지교'는 교육의 공이 피교육자에게 돌아가게 할 수 있을 때 완성된다. 교육의 공을 차지한 사람이라야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생명력을 발휘하여 비로소 이 세계에 우뚝 서는 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무엇을 해도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려 하지 않기"를 행하는 자이다. 그는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으로 강하게 무장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드시 실행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도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을 때 라야 그려질 수 있는 풍경이다. 이건 신뢰(信賴)의 문제이다. 영화나 모든 예술이 다 그렇다. 예술가가 예술 향유자의 수준을 믿어야 한다. 신뢰의 문제이다. 믿지 못하면, 예술가의 의도를 못 믿을까 봐 일일이 설명한다. 예술은 소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져야 한다. 영화의 경우로 들면, 관객이 영화 스토리에 직접 참여하여 함께 구성하는 형식이 아니라, 감독의 '일방통행'을 구경했다는 느낌만 남게 하는 경우에 그 영화는 재미가 없다. 감독의 강압성만 있고 관객의 자발성이 없어진다. 관객은 없고 감독만 남는 형국이 된다.
 
자식과 부모와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불신하면, 갈등이 생긴다. 이는 모두 기준 때문이다. 노자는 제17장에서도 "말을 아끼라(貴言, 귀언)"라고 말한다. 바로 '잔소리'를 줄이라는 말이다. 잔소리는 지켜야 할 것을 부과하는 이념이나 기준이다. 이것을 줄이는 일은 잘못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자식 삶의 주도권을 부모가 갖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갖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자발성이 일어나고, 스스로의 존재적 자각이나 자부심이 더 크게 자리한다. "불언지교"에 대한 사유를 하면서, 언젠가 들었던, '아이들은 잔소리보다 어른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고 배운다"는 말이 생각에 떠올랐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도올은 다음 세 문장,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 생이불유(生而不有), 위이불시(爲而不恃)"에서 '언(焉)'에 방점을 찍었다. 이 말은 "모든 일이 생겨나도 참견하지 아니하고, 낳으면서 소유하지 않고, 할 것 다 되게 하면서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는 거다. 도올에 의하면, 중간에 낀 "언(焉)"이 "어기(語氣, 말의 기운)의 흐름을 정돈(停頓, 잠깐 멈추게 한다)시키는 기능"이라는 거다. 어기를 멈추고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거란다. 그러니까 "만물이 쑥쑥 잘 자란다." "그럼에도," "성인은 사(辭)하지 않는다. 이(而)를 계기로 주어가 만물에서 성인으로 바뀌다는 거다.
 
"萬物作焉而不辭(만물작언이불사)"에서 '사(辭)'는 말씀, 언사(言辭)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만물이 잘 자라게 하면서도 (성인은) 이래라 저래라 하고 간섭하고 잔소리하지 아니 한다'는 거다. 성인은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해한다)"라 말했던 것과 그 맥락을 이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다음 내가 좋아하는 말이 "생이불유(生而不有)"이다.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기억해야 할 말이다. 자식을 낳았지만, 그 자식을 소유하려 하지 말아야 그게 도(道)라는 말이다. 내가 자식을 생하였다고 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최초로 부모의 생식 세포 염색체의 결합으로 접합체가 이루어지고 세포분열이 계속되어 엠브리오(싹)가 형성되어 태아로 발달해가는 과정을 거치지만 그 모든 생성과정이 고정된 실체의 연속태가 아니며, 수없이 다양한 이견을 파지(把持)해가면서 전개되어 가는 것이다. "생이불유"는 자연의 철칙이고, 만물의 생성 과정의 자연태(自然態)이다.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자녀를 소유물로 대하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 란다. 아이들은 문자 그대로 '작은 아이'이다. 그저 작을 뿐 성인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초대 받아 성인과 종류만 다를 뿐인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어린 생명체이다. 인식의 전환이 요구된다.  모든 아이들은 자율적 인간, 공감하는 시민으로 자라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제도의 개선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위계적 질서를 걷어내고,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타인과 공감하는 태도의 변화, 일상의 민주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爲而不恃(위이불시)"는 '도(=성인)'은 "만물이 잘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 되어가는 모습에 기대지 아니한다"는 거다. 여기서 "시(恃)"는 '기댄다', '의지한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도덕경>>의 여러 장에서 되풀이된다. 제10장에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생이불유, 위이불시, 장이부재, 시위현덕)". "낳으면서도 나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으면서도 지은 것에 기대지 않고, 자라게 하면서도 자라는 것을 지배하지 않는다. 이것을 일컬어 가믈한 덕이라 한다. 제51장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그리고 제77장에서는 "시이성인위이불시, 공성이불처, 기불욕현현(是以聖人委而不侍,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그러므로 성인은 만물이 자라도록 만들어가며 그 성취에 기대지 아니하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서 처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슬기로움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功成而不居(공성이불거)"는 "공이 이루어져도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는 거다. 자신이 공을 쌓고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무엇을 해 놓고도 뽐내지 않는다는 거다. 내가 무엇을 성취한다 할지라도 그 열매를 독차지하고, 그 성과를 따먹으면서, 그 성과 속에서 안주하는 삶의 태도를 근원적으로 벗어 내버리는 거다.

나는 참, 낙엽이 부럽다. 왜? 낙엽은 자신이 떨어져야 할 때, 자연스럽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저 때가 될 때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다. 떠나야 할 때 자연스레 떠나는 낙엽이 부럽다. 가야 할 때가 언제 인지 몰라 허둥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민망스러운가! 자연은 침묵으로 말한다.


낙엽의 에필로그/김인육

떠나야 한다는 걸 안다

한때의 눈부신 푸름을 접고
내 운명 여기 어디 쯤에서
가지런히 손 모으고
이젠 안식해야 한다는 것

온종일 서늘한 빛으로 퍼부어 대는
늦가을 햇살이
마지막까지 나를 아파하는
그대의 아린 사랑임을 안다

머잖아 그대가 다스렸던 영토에도
눈이 내리고
그대에게로 가는 길도
내게로 오는 길도
하얗게 묻히어
가끔 그대 생각에 꿈속에서도 까무러치다가
나는 선연하게 삭아갈 것이다

서슬 퍼런 바람이 불어
그리움에 여위어간 가지들이
바이올린처럼 울어대는 동안
어느새
짓밟힌 눈들이 녹고

흙으로 스며 내린 여린 뼈마디마다
문득 내 영혼의 젖꼭지가 가려운 봄날
추 운 겨울 내내 마려웠던 그리움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고
그대 훤히 바라보이는 꼭대기까지
싱그러운 수액으로 기어올라
내 사랑, 깃발처럼 푸르게 팔랑일 것이다 그대.

다른 글들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