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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도에 이르는 9 계단

3년전 오늘 글입니다.

1811.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11월 14일)

어제는 송준길의 별당인 '동춘당'에서 대전 우리 술 품평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거기서 다른 심사위원을 기다리다 한 컷 찍은 거다.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 이야기는 다음 주 어느 한 날을 잡아 <인문 일기>의 주제로 삼을 예정이다. 거기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은 이 술이다. 우리 동네 전통주 이야기도 어느 날 <인문 일기>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한다.

오늘 오전은 모처럼 한가하다. 그래. 지난 금요일에 이어, 다시 '통섭'이야기를 이어간다. 문명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전쟁은 지식을 양에서 가치관 문제로 이동시켰다. 융합의 반대말 중 하나가 거대담론(grand theory)이다. 거대 담론적 자아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선 타자가 알아야 할 것은 프로야구의 전반적인 이론이 아니라 상대 투수의 투구 패턴, 표정, 그가 직전에 던진 공이다. 이 같은 작은 단위들의 연속이 인생이다.

비슷한 말로 '신은 디테일에 있다', '오늘을 산다'. '상황', '맥락' 등을 알아야 할 것이다. 창의적 사고를 위해서는 앎의 규모에 대한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플라톤, 공자부터 공부할 필요가 없다. 지금-여기에서 내가 필요한 공부를 하다 보면, 고전과 만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려면 필요한 공부가 무엇인지 부터 깨달어야 하고, 또 깨달어진다. 그 전제는 자신의 포지션(사회적 위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일 전부터 다루고 있는 '도가구계(道家九階)', 즉 도에 이르는 9 계단을 다시 소환한다. 글을 눈으로 읽음-구송함-글의 문맥을 잘 살펴봄-글에 숨은 내용을 잘 알아들음-일을 잘 실천함-즐겁게 노래를 잘함-그윽함-빔-시원'이다. 위에서 말하는 도에 이르는 아홉 단계는 글을 읽되(①부묵, 副墨) 거기에 얽매이지 말고 읽어라. 그것을 오래오래 구송하고(②낙송, 洛誦), 맑은 눈으로 그 뜻을 잘 살 핀 다음(③첨명, 瞻明), 그 속에서 속삭이는 미세한 소리 마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깨닫고(④섭허, 攝許), 그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고(⑤수역, 需役), 거기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감격을 노래하라(⑥오구, 於謳). 그리하면 그윽한 경지(⑦현명, 玄冥), 조용하고 텅 빈 경지(⑧삼료, 參廖)를 체험한 다음 시원(始原)의 도(⑨의시, 疑始)와 하나되는 경지에 이르리라는 이야기였다.

'섭허' 단계에서 '수역(需役)으로 넘어간다. 수역이란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는 거다. 여기서 '지식과 실천의 분리'라는 말을 주목한다. 이 문제는 지식의 소용에 관한 거다. 이론과 실천은 원래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일단 지식이 쓸모가 없을 때, 이런 말이 나올 뿐이다. 현실에 맞는 이론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소용할 이론을 만들면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사유는 고통스럽고 어려운 노동이다. 그래서 대개는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현실을 가위로 잘라 없는 상태로 만든다. 예를 들어 사회적 약자의 드러나지 않은 고통은 권력 화된 무지의 대표적 효과이다.

지식은 내가 처한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몸이다. 그런 의미에서 통섭(通涉), 즉 융합은 새로운 몸, 변태(變態)의 과정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연속선에서 몸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다른 지식이 생산된다. 변태는 알아가는 몸, 그 변화를 총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야구로 말하면, 단지 당면한 볼 카운트가 우리의 현실이다. 지식은 야구장이 아니라, 스트라이크 존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스트라이크 존이라는 타자의 포지션에서 앎이 시작된다. 정희진 작가의 이야기이다. 그 예가 너무 적절하다.

앎은 구조 속에서 자기 자리를 인지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설정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앎은 존재의 GPS를 설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파악한 다음에 가능한 질문이다. 자신의 포지션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에게도, 지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는 뭔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다.

모든 지식은 특정 상황,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융합에서 포지션 개념이 중요한 이유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식의 본질적 성격인 부분성이 객관, 전체, 과학, 중립 등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지식은 인식자의 위치성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은 없다. 그래 융합은 우리가 그때그때 선택한 위치성에서 기존의 지식을 재 조직화하는 공부다. 창의적일 수밖에 없는 방법론이다. 여기서 '섭허'의 중요성이 나온다.

우리가 세계를 보고 듣는 모습은 모두 일부분이다. 자기 인식이 부분적이라는 진리, 즉 각자의 당파성을 인정해야 한다. 부분적 지식은 부족한 지식이 아니라, 성찰적 지식의 부족이다. 지식의 구성은 정치적 투쟁의 산물로 경합의 과정이다. 자기 위치성을 인식한 사람만이 당파성과 보편성이 반대말이라는 사실을 안다. 논쟁에서 이기는 첩경은, 자기 포지션과 상대방의 포지션을 모두 잘 파악할 때이다.

만물은 결국 나라는 렌즈를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나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社會惡)이 된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이 여론을 주도하거나 지도자가 될 때 공동체는 위험해 진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별, 계급, 인종, 지역 등 사회적 모순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기득권자나 사회적 약자 모두 자기 정체성을 아는 과정은 쉽지 않다.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혼란, 안 보이던 세상이 드러나는 놀라움과 두려움, 지적 호기심, 자기를 아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미로를 헤매는 일이기 때문이다. 위치성은 놓여진 현실임과 동시에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이동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사회, 인간관계,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숙고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잘 읽어야 이해가 된다.

자신의 자리(地)가 포지션이라면, 이를 인식하거나 이동하는 과정이 역지(易地) 포지셔닝이다. 역지사지는 공감을 넘어서는 권력과 자원의 문제다. 기득권자는 자신이 손해보는 역지사지가 싫고, 피억압 세력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상태 자체가 고달프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자신의 위성(GPS)이 앎의 본질이라는 것을 소환하고 싶다.

이런 차원에서 지난 주 배영옥 소설가의 글은 흥미로웠다. 자신의 포지션에서, “너 자신이 되지 말고, 바로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문장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거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허미니아 아이바라 박사는 진정성 대신 성실성에 집중하라고  했다. 그녀에 의하면, 진정한 자아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내면의 목소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외면을 찾으라고 말한다. 먼저 외면의 자아를 만들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얻는 것이다. 힘들어도 웃다 보면 즐거워지는 것처럼 행동은 뇌를 변화시킨다. 박사는 “리더처럼 행동해야 리더처럼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때 성실함은 관찰과 행동을 전제한다. 되고 싶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넷플릭스나 애플 같은 기업이 강조하는 변화의 리더십이 그것이다. 오늘도 네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하루를 보내고 싶다.

오늘 공유하는 시를 소개한 김기택 시인은 이런 덧붙임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표정에서 내 안의 수십 수백만의 내가 보이고, 내 안에 숨어 있는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들키니, 사람들 사이에 비밀도 없겠다. 내가 꾼 꿈 얘기를 하면 이미 다른 사람이 다 꾸어 버렸던 꿈. 내가 당한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예전에 다 겪었던 일. ‘그래 맞아, 내 얘기가 그 얘기라니깐.’ ‘어떻게 내 마음에 있는 얘기를 그렇게 족집게 집듯이 얘기할까.’ 서로 제 안에 있는 우성이를 신기한 듯 맞춰 보는 사람들. 내 안의 우성이들이 서로 저랑 놀아 달라고 아우성인데, 오늘은 어떤 우성이랑 놀아볼까." 내 안의 어떤 나와 오늘은 놀까? 나도 질문해 본다. 오늘은 대전 와인 페스티벌 마지막 날로 대전 시민 소믈리에 대회 결승전의 심사위원으로 오후에 참여한다. 그리고 오후에는 와인 페어를 돌아보며, 오후를 보낼 생각이다.


사람들/이우성

나는 나에게서 나왔다 예전에 나는 나로 가득 차 있었다

입안에서 우성이를 몇 개 꺼내 흔든다
사람들은 어떤 우성이를 좋아하지

우성이는 어둠이라고 부르는 곳에 살았다
그때는 우성이가 다를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미남일 필요조차
그러나 가장 다양한 우성이는 우성이었다

공기의 모양을 추측하는 표정으로 사람들이 서 있다
우성이가 사실인지 어리둥절하다
우성이를 만진다
우성이가 자신과 똑같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나 우성이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나는 내가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수십 수백만 개의 우성이가 떠오를 거라고 말했다

일요일이고, 소믈리에 대회 심사는 오후에 있어, 좀 더 어려운 이야기를 해 본다. 철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학 할 것 없이 모든 지식은 언어(인문학)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도 언어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언어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다. 글의 주장과 무관하게 일단 글은 잘 읽혀야 한다. 문장이 짧고, 감정적 표현은 자제할수록 좋다. 그러나 나는 가독성보다 생각하는 읽기를 권한다.

우리 사회의 담론 형성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너나 나나 한국 사회는 잘 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염원이 다다. 나는 이런 발전주의에 반대한다. 발전주의는 국가나 공동체 간의 힘의 경쟁이다. 강자들끼리 경쟁을 위해서, 사회적 약자와 자연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 결과가 팬데믹으로 나타났다.

평화 운동도 내부에 대립적인 사고가 공존한다. 일상과 사회 구조 차원에서 평화를 만들어가자는 평화운동과 평화는 힘에 의해서만 지켜진다는 평화=전쟁을 주장하는 현실중의 국제정치학도 평화를 다룬다. 그리고 생태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근본적으로 자연을 인간 활동의 대상으로 삼지 말자는 주장과, 녹색 성장이라는 말처럼, 국정지표가 되기도 한다. 융합 공부는 기존 지식은 물론이고 그 지식과 융합할 수 있는 자기 가치관을 확립하여야 된다. 자신의 관점을 확립하고 응용하려면 연습(practice)과 현실 개입적 실천(praxis)이 모두 필요하다. 융합은 주체(사람)와 가치관의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융합은 가치관에 따른 지식의 재구성이다.

앎의 궁극적 목적은 배제가 없는 온전함(holism)이다. 모든 분리, 분업은 위계화(hierarchy)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융합은 수평적인 결합이다. 이성, 합리성, 일관성은 특정 시기 인간에 대한 개념이었을 뿐 이미 현상학,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정신분석 등에서 수많은 반론이 있었고 지금은 거의 적용되지 않는 이론이다.이제 다중성이 정상이다.  

인문학과 과학 기술의 융합보다는 자연과 인간(과학기술+인간)의 융합이 맞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다. 그 언어에 과학기술도 포함된다. 철학, 사회과학, 자연 과학, 공학, 의학 할 것 없이 모든 지식은 언어(인문학)에서 출발한다. 참단기술도 언어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언어로 사유하기 때문이다. 단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다르다. 수학이 인류가 고안한 최고의 언어이다. 수학자들은 공식(formula, 공식)으로 소통한다. 경영학에서 재무는 회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피터 드러커는 뛰어난 경영자이자 인문학자이다. 그러니까 융합은 분과 학문이 아니라 가치관을 중심으로 한 분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의 사유는 정희진 작가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정 작가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통섭의 시대에는 노동자 한 명이 모든 일을 한다." 내 생각으로도 통섭은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이는 노동자의 인명 경시를 통한 비용절감을 '통섭'이라는 말로 자본과 자본가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융합하기 위해 복수전공 하라는 말도 틀린 말이라고 정희진은 꼬집는다. 그래 융합하는 사람이나 통섭하는 사람이  전문가의 반대인 교양인은 아니라고 본다. 전문가(스페셜리스트)와와 교양인(제너러리스트)을 다르다.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전문가들이 제너럴리스트, 즉 교양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에 관한 책도 읽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전문가들은 삶과 세계에 대한 빅 피처를 그리지 못하고, 디테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이 문제는 2020년 12월 23일자 나의 <인문 일기>에서 깊게 다른 적이 있다.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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