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3.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3월 1일)
오늘은 새롭게 시작하는 3월 1일이다. 나는 적어도 이 날만큼은 1919년 3월 1일, 3·1 만세 운동을 기억하고 싶다. 그 당시 나라면 만세 운동에 나갔을까? 다 잘 아는 것이지만, 다시 한 번 공유한다. "일제 강범기에 있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위키백과)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장례일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그런데 오늘은 월요일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주부터 매주 월요일 아침 글쓰기는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했다. 오늘은 톨스토이가 보여 주는 이야기의 힘을 공유한다. 톨스토이는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가난한 구두장이가 모피 외투를 사러 외상값을 받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는 술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예배당에서 벌거벗은 남자를 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가 그만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되돌아가 그를 집에 데려온다. 내일 먹을 빵마저 없어 걱정하고 있던 아내는 남편의 농민 외투를 걸치고 있는 낯선 사내를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다. 설상가상 저녁을 차려 달라는 말에 가출하려던 아내를 붙잡은 건 "자네 속에는 하느님이 없는가?"라는 물음이었다.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첫째와 셋째 질문의 답은 '사랑'이다. 사람들은 나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랑 하나만으로 살아간다는 게 톨스토이의 답이다.
이 답은 이 성경 구절에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매일의 삶 속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를 알아 뵙고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또 다른 단편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이다. 주인공 마르틴은 구두를 만들고 고치는 제화공이다. 착하고 성실한 그가 절망에 빠졌다. 5년 전에 자식 두 명과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는데, 근래 하나 남은 막내아들까지 병으로 죽었다. 그는 매일 술로 시간을 보내며, 자신도 빨리 죽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의 삶에 감동을 받은 그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새로운 희망을 되찾아 성경 읽기에 열중했다.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르틴, 내가 내일 찾아 갈 테니 창 밖을 보아라.” 마르틴은 그날 하루 종일 창 밖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언제쯤 오시려 나" 중얼거리며 하나님을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온다는 하나님은 오지 않고, 창밖에 늙은 청소부가 눈을 맞으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마르틴은 그를 가게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따뜻한 차를 대접하였다.
청소부를 내보내고 두어 시간이 지나 창밖을 보니, 아기를 안은 여인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었다. 그는 여인을 가게 안으로 맞아들여 먹을 것과 옷을 대접해 주었다. 또 시간이 흘러 거의 해가 질 무렵, 창밖을 바라보니 사과를 파는 늙은 노파가 사과를 훔친 소년을 붙잡고 야단치고 있었다. 마르틴은 밖으로 나가 소년의 죄를 뉘우치게 하고, 사과 값을 대신 갚아주며 노파가 소년을 용서토록 권유하여 원만하게 해결해 주었다.
마르틴은 날이 어두워지자,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마르틴은 성경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그 때 어둠속에서 자신이 낮에 대접했던 늙은 청소부와 아기 안은 여인, 노파와 소년이 나타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르틴, 네가 오늘 만난 사람들이 바로 나이다. 너는 나를 대접한 것이다”
이후 마르틴은 꿈에서 깨어 나 펼쳐져 있는 성경을 보니,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를 따뜻하게 맞아들였고, 헐벗었을 때 옷을 주었으니, 내 형제 중에 보 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극진히 대접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니라.”
오늘 공유하는 시도 사랑의 이야기이다.
사랑/김중
곱추 여자가 빗자루 몽둥이를 바싹 쥐고
절름발이 남편의 못 쓰는 다리를 후리고 있다
나가 뒈져, 이 씨앙놈의 새끼야
이런 비엉-신이 육갑 떨구 자빠졌네
만취한 그 남자
흙 묻은 목발을 들어 여자의 휜 등을 친다
부부는 서로를 오래 때리다
무너져 서럽게도 운다
아침에 그 여자 들쳐 업고 약수 뜨러 가고
저녁이면 가늘고 짧은 다리 수고했다 주물러도
돌아서 미어지며 눈물이 번지는 인생
붉은 눈을 서로 피하며
멍을 핥아 줄 저 상처들을
목발로 몽둥이로 후려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사랑은 얼마나 어렵고 독한 것인가?
같은 메시지이지만, 다음 글은 논변적이다. 예수가 카리스마 넘치는 예언자가 된 것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원칙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원칙은 자기 중심적인 아기심에서 벗어나 타인과 주변, 특히 옆에 있는 나그네의 처치를 생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인식하게 된 유일한 통로는 낯선 자를 인식하고 그에게 비정상적인 만큼의 호의를 베푼 것이다. 예수는 낯선 자이다. 낯선 자에게 행동으로 컴패션을 보여줄 때, 신의 신비가 우리 눈 앞에 등장한다.
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가는 길을 읽다 보면, 그 때 예수가 살아진 것은 자신들 앞에 나타난 이 낯선 자가 '진짜' 예수라고 사칭하면서 종교 장사를 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복음은 예수가 바로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매일매일 만나는 '낯선 자'라고 증언한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낯선 자를 회피하고나 차별하고 우리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다. 우리는 '자아'라는 무식에서 벗어나 '무아'로 신을 대면하기 위해 '다름'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어떤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른다. 신의 특장은 '낯섦'과 '다름'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제한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파편적이고 편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과 완벽하게 다른 존재와 만나는 것이 종교이다. 나와 다른 이데올로기와 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 개벽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 낯섦과 다름을 수용하고, 그 다름을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여기며 대접할 때 신은 비로소 우리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 인간은 유대 없이 살 수 없으므로 저 신뢰 사회에서도 기댈 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연(緣)의 네트워크, 즉 혈연, 지연, 학연이다. "믿을 건 형제밖에 없다"는 가족주의, 타향을 배척하는 지역주의, 능력보다 학교를 중시하는 학벌주의다. 공동체 전체가 공유하는 공정한 사회 규범이 모자란 사회에서 적은 신뢰 자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세대의 어두운 유산이다. 아버지를 존경하나 더는 아이들한테 물려줄 수 없고, 아이들 역시 기성세대의 모습에서 가장 크게 반발하는 지점이다."(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이건 상호 신뢰의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연의 네트워크를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낙하산이 날아다니고 청탁이 횡행한다. 자본과 권력이 법의 지배를 거부하고 중산층은 재산과 지위의 편법적 대물림을 욕심 낸다. 체육계 폭력에서 보듯, 약자에 대한 갑 질과 괴롭힘은 일상적이다. 이 모든 것이 신뢰를 파괴하고, '한국이 싫어서'로 이어진다. <트러스트>에서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민주주의도, 경제 성장도, 사회 복지도, 신뢰 자본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 발전에 따라 증가하는 상호작용에 필요한 거래비용이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선진 사회로 나아가려면 낡은 규범에 대한 척결과 함께 신뢰 자본의 전면적 재구축이 필요하다. 낯선 내 이웃에게 보이는 사랑 속에서 예수가 등장한다. 회복해야 할 우리의 시대정신이다. 함께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활동이 시작된다. 다시 한 번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사유해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월에 공유했던,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 랍비 조너던 색스 경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공유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뭔가 어렵고 심오한 것을 깨닫고자 노력할 이유는 없다. 그런 건 나처럼 종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나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매일 아침 눈을 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는 지금 살아 있는가?' '나는 지금 나누고 있는가?' '나는 지금 용서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충분하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단어 셋을 꼽으라면 '살자, 나누자, 용서하자'다. 이 세단어를 충분히 생각하고 깨달으면 삶에서 잡아야 할 기회와 저항해야 할 유혹을 구별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좀 더 이야기를 끌어간다.
- '지금 살아 있다'는 깨달음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러주는 단서가 되어준다. 더 쉽게 말하면,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가?'라고 질문을 하고 매일 아침에 답을 짧게 라도 적어보라고 한다. 살아도 죽은 사람처럼 사는 사람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질문이다.
- '나는 지금 나누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내게 힘을 주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나를 지지하고 믿어주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나면, 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짜 더 중요한 것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연결된 사람들과 삶을 나누어야 한다. 슬픔과 가쁨을 나누고, 성과 목표를 나눠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의미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혼자 있는 기간을 갖는 것과 외톨이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 '나는 지금 용서하고 있는가"는 나의 반대자나 적응 향한 물음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 사이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라는 것이다. 내 삶의 평화와 행복을 반대하는 세력은 싸워 이겨야 할 대상이지 용서할 대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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