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0.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17일)
언어의 탄생이 호모 사피엔스를 전인류로 묶어 주었다면, 문자가 탄생하며 또 하나의 도약을 하게 된다. 동아시아는 한자, 인도는 산스크리트어, 중동은 아랍어, 유럽은 라틴어가 탄생하며, 호모 사피엔스는 창조적인 도약이 시작되었다.
말은 시간적 선형성을 지니고 있어서 불 가역이고, 허공에 흩어지면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이 시간과 공간을 넘으려면 결국 인간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사유가 말보다 더 오래, 멀리 전파되는 회로를 찾고자 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기억이란 조건을 넘어서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자가 탄생한 것이다.
"인간은 말로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데 이것이 사고를 교류하는 첫 단계이다. (…)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이, 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후세의 사람들, 동시대인이 아니어서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보내는 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이것은 글의 교류로 이루어진다."(이븐 칼둔, <무낏디바>)
언어를 문자에 담으면서, 우리는 불멸을 얻었다. 이로서 일류는 시간의 한계, 공간의 장벽을 통과하고, 시공을 넘어 인간과 세계를 연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을 정의해 보면, 말을 하고, 말을 듣는 존재, 이에 더해 문자를 기록하고, 그것을 읽는 존재이다. 태초에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피던 그 관찰이라는 실존적 행위는 여전히 계속되지만, 그것은 이제 말과 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말과 글은 늘 서로 번갈아 등장한다. 때론 유연하게 어울리고, 때론 심오하게 맞서면서, 하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즉 천지인을 연결하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신성한 행위라는 점에서 말이다. 존재와 세계가 완벽하게 소통하는 그날까지 말이다.
문자가 등장하자 글이 나왔다. 이 때 나무가 큰 역할을 한다. 나무는, 처음에는 죽간으로, 그 다음에는 종이로, 지식을 전달하는 전령사가 된다. 그리고 문자가 종이를 만나서 책이 되었다. 책은,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더 길게, 더 멀리 전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창조된 것이다. 어쨌든 책은 나무가 인류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이다.
정리하면, 말이 문자로 변이되고, 그것이 다시 종이를 만나 책이 되면서 지혜는 듣기에서 읽기로 변주된다.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듣고 읽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듣기에서 읽기로 전환되면서 지식은 양적으로 폭발하고, 질적으로 바뀐다. 책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고미숙은 다음과 같이 멋지게 쓰고 있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선 단단한 흙과 물이 있어야 하고, 광합성작용이 있어야 하고, 바람과 번개, 우박과 비가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온 우주가 다 결합하여 나무를 키우고, 그 나무는 자신에게 다가온 우주적 정보를 인간에게 전달한다. 그것이 곧 책이다." 이젠 나무도 다르게 보이고, 책도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진리를 담은 책을 경전이라고 하지만, 고대의 책은 그 자체로 경전이다. 고대에는 책을 함부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담은 경전이 아니면 무슨 여력으로 책을 만들 수 있었겠는가? 우리 시대에는 책이 품고 있는 이 원리와 이치를 사람들이 잊고 있다. 사람들은 책이 그저 정보와 지식의 그릇이라고만 여긴다. 책 안에 우주가 출렁인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는 행위가 얼마나 거룩한 일인지 잘 모른다. 따라서 살면서 책과의 만남보다 더 신성한 순간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면서 배운다는 것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은 삶의 토대이자 존재의 조건이다. 책과의 만남이 있고, 그 위에서 인생이라는 길이 시작된다. 우리가 만나는 책들 속에는 삶을 고귀하게 그리고 신성하게 만드는 길이 있다. 예를 들어 책을 읽으면 물욕이 사라진다거나, 남을 속이고 싶다든가 망상에 빠진다든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욕망에 중독된 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읽기는 듣기의 변주다. 그러니까 읽기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우주의 진리를 듣는 것과 같다. 그리고 들었으면 정직하고 진실하게 응답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길이다. 그런데 우리는 책에 담긴 존재의 원리와 세계의 이치를 무시한다. 신의 목소리를 듣고도 응답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질문이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안다는 것은 질문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묻고, 답하고, 다시 묻고, 그것이 앎이다. 그러니 질문이 없다는 건 책에 담긴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날씨가 다시 추워지고, 저녁에는 눈도 많이 온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5인 집합 금지라는 생활 속 거리두기가 2 주간 더 연장 된다고 한다. 코로나-19의 방역 원칙이 '흩어져야 산다'이다. 코로나 후유증 연구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에서 회복되더라도 상당수가 탈모, 폐 섬유화, 외상 스트레스장애 등을 겪는 것으로 확인됐다. 어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코로나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 현재로선 거리두기를 철저히 지키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슬프다.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까. 그래 오늘 아침은 따뜻한 시를 공유한다. 이 시를 소개한 반칠환 시인도 훈훈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1976년의 일이다. 충청도 산골에서 어떤 소년이 다람쥐 한 마리를 사로잡아 체 속에 가두었다. 장차 쳇바퀴 돌리는 서커스 기예를 펼치게 할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체가 바람에 뒤집힐까 봐 주먹만 한 돌 몇 개를 얹어 놓았다. 소년이 마당에서 노는 동안 다람쥐 여러 마리가 체 감옥에 면회를 온 듯 북적거렸다. 별 일 있으랴 싶었다. 시간이 지나서 가보니 체 감옥이 뒤집혀 있었다. 다람쥐 동료들이 와서 돌들을 밀어내고 탈옥을 시킨 것이었다." 사진은 작년 이 맘때 대청호 길을 여럿이 걸을 때 찍은 것이다. 동료의 뒷 모습에서 흙과 백의 '우연한" 조화를 만났다. 그 시절이 그립다.
산다는 것의 의미/이시영
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 밖에 안 된 집을 부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 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날라다 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금요일에 다녀가신 형수님은 안목이 대단하시다. 학창 시절부터 문학에 매우 관심이 있으셨다. 그 형수님이 우리 가족의 단체 카톡에 공지영 작가의 시를 올리셨다. 그건 내일 공유할 생각이다. 덕분에 공지영 작가의 최근 작품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e-book으로 구매하여 읽기 시작했다. 작가의 깊은 사유들이 별처럼 빛나는 문장으로 가득하다. 공 작가가 말하는 대로, 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을 정말 소중하고 예쁘게 채색하고 싶다." 다음 주에는 이 책 이야기를 좀 할 생각이다.
다시 앞에서 했던 오늘의 화두 이야기를 이어간다. 중요한 것이 읽으면 써야 한다. 읽기와 쓰기는 동시적이다. 말하기와 듣기처럼. 읽기만 하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할 뿐이다. 읽고 쓰지 않는다면, 창조와 생산은 없다. 지성은 글을 생산한다는 뜻이다. 글을 생산하지 못하는 지성은 형용모순이다.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읽기는 그저 정보만 환원된다. 그 정보는 아무리 원대하고 심오해도 결코 존재의 심연에 가 닿을 수 없다. 그때 책은 더 이상 책이 아니다.
책이 신체와 접속, 감응하여 '활발발한 케미'가 일어나는 것이 쓰기이다.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소화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에너지로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치로 지식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읽었으면 신체와 융합되어야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굳어진' 사유의 지도를 바꾸고, '진부한' 말의 회로를 변경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쓰기이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에게 얻는 더 좋은 생각은, 읽고 쓰기보다 쓰기 위해 읽어라는 말이었다. 배치를 다르게 하는 것이다. "쓰기 위해 읽어라!" 먼저 자신의 깊은 심연을 들여 보고, 또 산책하면서 우주의 이치를 살피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세상의 일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책을 읽으라는 말이다.
우주는 거대한 도서관이다. 인간이 두 발로 선 이상, 우리는 변화무쌍하고 흥미진진한 이 우주의 책을 외면할 수 없다. 천지라는 이 우주의 도서관에 일단 발을 들여놓은 이상 우리는 읽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삶은 읽기이다. 살아 있는 한 모든 것을 우리는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앎이고 앎은 곧 읽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기가 생명의 활동이 되려면 써야 한다. 사람들은 쓰기를 읽기 다음에 둔다. 그러나 읽기와 쓰기는 동시적이다. 읽은 다음에 쓰는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해 읽는 것이다. 사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쓰지 않고 읽으면, 곧 잊는다. 그러나 쓰기를 전제하고 읽으면 아주 달라진다. 쓰기는 읽기의 방향과 강/밀도를 전면적 바꿔 준다. 비유하자면 구경하는 것과 창조하는 것 사이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쓰기를 해 보면, 책의 독자로 그치지 않고, 책에 담긴 언어가 깊은 사유의 산물이라는 것을 공감하고 찬양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 사유와 만나게 되는 희열을 느낀다. 이젠 "읽었으니 써라!'가 아니라 '쓰기 위해 읽어라!'로 배치를 바꾸는 것이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이 했던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강의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의 Youtube 강의를 잘 들었다. 거기서 조선 정조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정조의 삶은 배움, 곧 읽기 쓰기였다는 것이다. 흔히 권력은 소유와 지배, 나아가 쾌락의 증식일 뿐, 거기에서 자유와 충만함을 누리기란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이 둘을 가늠하면서 헷갈려 한다. 물론 선택은 언제나 소유와 쾌락 쪽으로 기울고, 그러면서 삶이 힘들고 공허하다고 한탄한다. 헷갈린다기보다 진실을 알고 싶지 않다는 게 더 정확한 것인지 모른다. 고미숙이 인용하고 있는 안대희가 쓴 <정조치세어록>의 내용을 재 인용한다.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 첫째로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진리를 배워서 성인 펼쳐 놓은 깊고도 미묘한 비밀을 들여다본다. 둘째로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별하여 천 년의 긴 세월 동안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시원스레 해결한다. 셋째로 호방하고 힘찬 문장 솜씨로 지혜롭고 빼어난 글을 써내어 작가들의 동산에 거닐고 조화의 오묘한 비밀을 캐낸다. (…) 이것 이야말로 우주 사이의 세 가지 통쾌한 일이다."
나도, 정조처럼, 와인을 팔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하니, 인문운동가로 다음과 세 가지를 삶의 즐거움을 삼는다.
(1) 경전 및 고전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 필요한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우주와 그 사이에 있는 인간들의 비밀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한다.
(2) 그러면서 문제의 대안을 찾아 해결하는 활동을 작은 범위에서부터 게을리 하지 않는다.
(3) 그 내용들을 글로 쓰며, 많은 사람들과 공유한다.
짧게 말해, 정조처럼, 배우고, 읽고, 사유하며, 쓰는 일을 하고 싶다. 산다는 건,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인문의 삼중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삼중주의 리듬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세 질문도 궁극적으로 이 배치 안에 있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인간이 전지, 하늘과 땅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의 별을 보지 않고, 땅을 보는 안목도 잃었다. 땅이 투자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인간이 천지보다 더 높은 존재로 올라섰다. 그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공격을 당하며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는 중이다. 이제 앎은 자연지의 광대한 지평에서 벗어나 오직 인간을 중심으로 삼는 문명지로 축소되었다. 천지인을 아우르던 그 통찰력은 한낱 신화가 되어 버렸다. 그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내일 이야기를 더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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