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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에, 진리는 역설이라고 말한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10월 5일)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말이 <<도덕경>> 제41장에 나온다. 나는 "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로 알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큰 그릇은 완성이 없다"로 읽어야 하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대기만성(大器晩成,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말은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는 좁은 소리라고 본다.)이라는 노자의 말이 원래는 '대기면성(大器免成)'을 잘 못 표기한 것이라 한다. '대기면성'의 면(免)자가 '면할 면'자이다. 이 말은 '진정 큰 그릇에는 완성이 없다'는 뜻이다. 즉, 큰 그릇이 되는 것은 끝이 없는 '완료형'이 아니라, 계속해서 완성해 나가야 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오늘부터는 '대기만성'이라 쓰고, '대기면성'이라고 읽을 생각이다. 완성보다는 진행이 더 아름다운 것이란 말이다.

'도'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작은 것을 크다 하고, 약한 것을 강하다 하고, 깨끗한 것을 더럽다 하니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들의 비웃음을 산다. 참된 진리를 말한 사람은 다 그랬다. 지구가 돈다고 했던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돈 사람 취급을 받았고, 물을 이용해서 시계를 제작할 수 있다고 했던 장영실은 따돌림을 받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지동설이나 자격루는 과학에서의 큰 도가 되었다. 그래서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고 했다. 지구는 돌면서 엄청난 소리를 내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큰 존재인 우주에는 아무런 형체가 없다. 그래서 "대음희성(大音希聲, 큰 소리는 소리가 없다.)", "대상무형(大象無形, 큰 모습은 형체가 없다)"이다. 도는 들리지 않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 감춰져 있으므로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그로부터 만물이 태어나고, 이루어지므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큰 존재다.

도올 김용옥은 이 장을 읽으면서, "노자라는 개인, 그 고독한 사나이, 그토록 그의 시대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우주와 인간 역사를 통관할 수 있었던 그 영민한사나이, 그 사나이의 실존적 고뇌, 불안, 걱정, 근심 그리고 분노를 절절하게 느낀다"고 했다. 오늘 아침 정밀 독해를 할 제41장의 도입부 중, "下士聞道(하사문도) 大笑之(대소지) 不笑 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라는 문장을 다음과 같이 속되게 번역하였다. 그런데 통쾌하다. "하삐리 새끼들이 내가 말하는 도를 들으면 웃긴다고 깔깔거릴 거야. 그런데 그 새끼들이 깔깔대고 웃지 않는다면 내 도는 도가 아닐 수 없는 거야!"

도입부는 다음과 같다.
上士聞道(상사문도) 勤而行之(근이행지): 훌륭한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동에 옮기고
中士聞道(중사문도) 若存若亡(약존약망): 중간치기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며 의심하고,
下士聞道(하사문도) 大笑之(대소지): 하류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不笑 不足以爲道(불소부족이위도) : 하류 사람들이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엔 부족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선비라는 말을 지식인으로 읽고 싶다. 훌륭한 지식인(士)은 노자가 말하는 도에 대한 철학에 동조하고 실행에 옮기겠지만, 중류, 하류 지식인들은 의심하거나 크게 비웃을 것이라 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비웃지 않으면 진정한 진리(도)라고 할 수 없다는 거다. 노자는 자신의 도에 대한 철학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말하고 있는 거다. 위대한 진리는 처음에 배척을 받거나 무시를 당했다. 새로운 진리의 시작은 사람들의 불신이 함께 했다.

진리는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에, 진리는 역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상적 상식인으로서 이렇게 한 가지 사물이 정반대되는 두 특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따라서 상식적인 이분법의 단선적인 사고 방식에 지배 받고 사는 우리로 서는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소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크게 웃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 것은 도가 아니라고 했다. 정확한 통찰이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이 아니라는 뜻이고, 역설적이 아닌 것은 궁극 진리가 아니다. 궁극 진리는 언제나 일상적 의식을 근거로 한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 지기들은 일언지하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웃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그럴까 안 그럴까 반신반의하는 "방법적 회의"(데카르트)를 하며 의심한다. 여기서 또 한 단계에 더 올라서서 사물을 변증법적, 역설적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리 자체에 아무런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열심히 따르고 실천하는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근기(根機)'라는 불교 용어가 있다. '근기'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끈기’라는 말도 바로 이 '근기'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 '근기'에는 '상근기(上根機)', '중근기(中根氣)' 그리고 '하근기(下根機)'가 있다. '상근기'가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사람을 가리킨다면, '하근기'는 성불하기에 자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근기', '상근기'로 올라갈 수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기'의 고비이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기'로 못 가고 심지어 '하근기'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기' 사람들을 우리는 일종의 '병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주변에서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자신을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기'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을 '중근기'일수록 더 하지 못한다.

불교 이야기를 좀 더 한다. 절에서 가끔씩 듣는 “성불(成佛)하세요!”라는 말은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자신도 이롭게 만들고, 타인도 이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서 가장 이롭게 된 상태는 ‘주인공’으로서 당당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으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즉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사실 누구나 다 성불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는 고정되어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 안아트만)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별도로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부처가 되려는 소망을 현실화하려고 끈덕지게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근기'가 탁월한 '상근기(上根機)'이다. 용기가 있어서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번지 점프를 하는 것이 용기가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험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주인공이 되는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 이야말로 정말 '상근기' 정도가 아니라 '최상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사람을 '거사(居士)'라고 한다. 비록 스님이 되지 않았지만 어느 스님보다 치열하게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성불하려면, 임제 선사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다”는 뜻이다. 진정한 주인이라면,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곳이 주인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어디서든지 자신이 주인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절에 들어가지 않아도 일상의 삶 속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생각을 당하지 않는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가진 자이다.

근기(根氣)는 '근본이 되는 힘'이다. 이 근기가 두텁지 못한 사람, 중근기 사람들은 심고 가꾸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고, 과실 수확에만 마음이 가 있는 사람이다. 끝내 그런 이들은 결과 따위에는 연연해 하지 않는다고 하며, 도량이 넓은 척할 뿐이다. 우리는 근대 이후 중근기의 병자를 대량 생산하는 체제 속에서 살았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 정보 기술의 극대화로 하근기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기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 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자기 몸과 마음을 닦아 인간 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이어서 노자는 이어지는제41장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유명한 말들을 빌려 도의 역설적이고 변증법적인 여러 특성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매우 흥미롭다. 그 이야기는 내일 아침에 이어간다. 오늘 아침 사진은 어제 오후 주말 농장에 가다가 찍은 거다. 노자가 이 장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기를 허수아비로 만들 때, 진짜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로 읽었기 때문에 이 사진을 공유한다. 그리고 마침 불교 이야기를 했기에, 스님 시인의 시를 오늘 아침 공유한다.

허수아비/조오현(霧山 스님)

새 떼가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고
사람이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 논두렁 밟고 서면 -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 가을 들 바라보면 -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손 흔들어주고 숨 돌리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다른 글들은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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