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그래도 자연은 자기 할 일을 한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읽다가, 산산조각이라는 단어 만나, 스마트폰으로 그 단어를 찾아 보았다. 산산(散散)은 한자이고, 조각은 한자가 없다. 뜻은 "여러 조각으로 아주 잘게 깨어진 상태"이다.  그리고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 소개된다. 정말 이젠 스마트폰 속에 지식이 다 들어 있어, 이젠 뭘 기억할 필요가 없는 시대이다. 오늘 아침 그 시를 공유한다.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는 나에게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고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우연히 좋은 시를 만났다. 그러니 잘 모르면 찾아보고, 찾다 보면 또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된다.
깨어진 그것은 깨진 채로 두기로 했다. 머리로 몰랐던 건 아니다. 그러니까 머리로만 아는 것을 우라는  안다고 해야 할까? 이런 말을 원노트에 적어 둔 적이 있다.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신(神)은 거울 하나를 던져 산산조각 낸다. 우리는 살면서 깨져 흩어진 조각을 모으고 삶이 끝날 때 비로소 완성된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본다."

작년 이맘 때는 전혀 예상도 못한 일인데,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전염병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소설 <페스트>는 새롭게 읽한다. 그 소설을 쓴 까뮈의 철학을 우리는 "압쉬르드(absurde)철학"이라 한다. 이 말은 '부질없음', '무의미'한 뜻이다. 까뮈는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고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이라 답하였다. 그 예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예로 든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신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 있는 일이다"라고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현대인들의 권태롭고 전망 없는 일상이 시지프스의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과 같다고 쓰고 있다. 코로나-19로 우리들의 삶이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했다. 권태롭고 전망이 없는 삶이 계속된다.

그래도 자연은 자기 할 일을 한다.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깊어 간다. 어제 오후에는 해가 떴다가, 구름에 가렸다가 했다. 오늘 아침 사진은 잠깐 가을 햇살 좋은 시간에 주차하면서 만난 하얀 무궁화(無窮花) 꽃을 찍은 것이다. 그 꽃은 세상과 무관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조용하게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 그 꽃은 깨끗하게 샤워하고, 세상을 비춘다. 까뮈 식으로 말하면, 그는 '반항'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 아침 시를 읽은 후 이어간다.


산산조각/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까뮈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시지프스를 인간승리의 상징으로 복권하였다. 인간의 삶이 비록 끝없는 좌절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이상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데서 그 가치와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의 가치는 완벽한 성취가 아니라, 성취를 향한 노력, 성실한 자세, 좌절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내다보는 희망의 태도라는 것이다.

까뮈는 <페스트>에서 소설 속의 인물 타루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나는 이것을 코로나-19로 바꾸어 읽었다)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그 누구도 그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늘 스스로를 살펴야지 자칫 방심하다가는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서 병독을 옮겨 주고 맙니다. 자연스러운 것은 병균입니다. 그 외의 것들, 즉 건강, 청렴, 순결성 등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될 의지의 소산입니다. 정직한 사람, 즉 거의 누구에게도 병독을 감염시키지 않는 사람이란 될 수 있는 대로 마음이 해이해지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329쪽) 부조리한 사람 속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와 긴장이다.

까뮈는 이러한 태도로 우리에게 '사막에서 버티기'를 제안하였다. 우리들이 겪는 삶의 고단함과 무의미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버티기'라고 했다. '버틴다는 것'은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꿋꿋이 견딘다는 것을 뜻한다. 도피하거나 초월하려 하지 않고, 정면으로 사막 같은 현실과 싸우는 것이다.

툭툭 털고 다시 내려와, 아무렇지 않게 다시 바위를 들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모습을 실존주의 철학으로 해석하는 까뮈에게 나는 대학시절에 열광했었다. 까뮈에 의하면,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반항'이라면서 실존주의 철학을 대변했다. 그는 삶의 부조리성, 무의미성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는 인물로 시지프스를 꼽았던 것이다. 까뮈는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그 어떤 희망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언제나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향해 다시 돌아서는 시지프스의 모습에서 부조리에 정면으로 '반항하는 인간'의 당당한 자세를 보았다.

그가 말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산다는 것, 그것은 부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은 먼저 부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고  까뮈는 말했다. 여기서 부조리란, 그에 의하면, "세계, 그 안에서의 삶이 가진 이해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나 부조리, 즉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앞에서 자살 같은 도피는 문제의 소멸일 뿐, 해결이 아니다. 까뮈는 그 문제 해결은 반항이라고 했다. 여기서 반항은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를 반항하는 인간의 표본으로 소개하였다. 그는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그의 모습에서 반항을 보았다. 알베르 까뮈에 의하면, 이 시지프스의 행위가 '무의미에 의미 주기'란 것이다. 이것은 무의미한 삶에 스스로 '반항'이라는 의미를 줌으로써 그 형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로써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는 그의 말이 요즈음 이해가 된다. 여기서 내가 반항하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우리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곧 부조리 앞에서,
▫ 희망을 갖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
▫ 구원을 호소함 없이 사는 것
▫ 자살로써 회피하거나 기권하지 않는 것
▫ 쓰라리고도 멋진 내기를 지탱하는 것이다.

내 친구는 마지막 '멋진 내기'가 이해 안 된다고 했다. 여기서 '내기'란 <페스트>에서 신부가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우리는 신을 혐오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대체 누가 감히 신에 대한 증오를 택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선택에 놓일 때, 더 선한 쪽으로 내기를 걸듯이 선택하는 것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우리마을대학_디지털_인문운동연구소 #사진하나_시하나 #정호승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