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좋아 한다. 물맛이나 밥맛의 소박한 맛. 세상의 온갖 '야리꾸리'한 맛이 판을 쳐도 심심하고 담담한 밥맛 물맛을 따를 수 없으니. 영혼의 양식인 시 또한 소박미가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나는 우리 동네 사람들을 좋아한다. 고향을 떠나, 지금 정착한 동네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오늘은 우리 동네의 마을 축제가 있는 날이다, 비록 덥지만, 즐거운 '여름 나기'를 할 생각이다. 동네 어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나는 배웠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그들은 소박하다. 시처럼, 물맛이나 밥맛처럼, 소박한 맛이 난다.
고향을 한자로 쓰면, '故鄕'이다. '古鄕'이 아니다. 고향을 한자로 쓸 때 옛 고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고향이 단지 "단순히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오랜 시간 전의 동네"가 아니라는 말이다. 고향(故鄕)의 '故'자는 '연고 고'자로, '근거'이고, '원래'이고, '본래'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까닭'이고 '연유'이다. 그러니까 '고향'은 '나의 본래 모습', '원래의 나'가 있는 곳이다. 고향은 나의 '까닭'이다. 이 곳에서는 내가 '일반명사'로 내가 사라진 곳이 아니고, 내가 '고유명사'로 살아 있을 수 있는 곳이다.
반면, '나'들이 '모르는 타자'들의 거대한 공간 속에 묻혀, '나'가 또 '다른 일반적인 사람'으로 동화(同化)되어 가는 곳이 타향(他鄕)이다. 타향에서의 '나'는 '고유명사'인 '나'로 돌아다니거나 '원래의 나'를 드러내고 다니기보다는 '타자'들과 동화되면서 갖게 된 다양한 수식어의 덩어리의 가면을 쓰고 다닌다. 아니면 '익명성(匿名性)' 속에 지낸다. 타향에서 우리는 익명성 속에 숨어 지내는 '감춰진 존재'가 된다. 그리고 '감춰진 존재'들 끼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다양한 장식을 통해서만 가늠할 수밖에 없다.
고향에 산다는 것은 '나'로 사는 일이다. 내가 '나'로 존재하지 않고, '우리' 중의 한 명으로 존재해 버리면, 그것은 모두 타향살이다. '나'를 삶의 주인으로 두지 못하고, 그 주인 자리를 화장기로 꾸며 놓은 뻣뻣한 가면에 양보하고 사는 사람은 고향을 잃고 방랑하는 사람이다. 고향은 바로 내가 나로 드러나는 곳이다.
네 주인 자리를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람, 모두 고향을 찾은 사람이다. 여름 휴가를 떠나기 전 날이지만, 동네 사람들과 가장 '나' 답게 놀 생각이다.
오늘 공유하는 시처럼, 고향을 찾지 못해 마을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모든 그때는 절정이다/모든 나이는 아름답다/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박우현
이십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대에는
마흔이 무서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인문운동가_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_시하나 #박우현 #복합와인문화공간_뱅샾62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은 감추고 있을 때 무서운 법이다. (0) | 2024.08.10 |
---|---|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이상한 나라"가 된 것일까? (0) | 2024.08.10 |
내 공간, 내 시간, 내 취향이 중요한 시대이다. (0) | 2024.08.10 |
사물의 핵심에 다가서는 길은 '8괘'를 잘 익혀두는 거다. (0) | 2024.08.09 |
짧은 인생을 살면서, 아름다운 것은 똑같아지는 게 아니라 개성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0) | 2024.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