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2년 7월 29일)
어제 우리는 분별 없이 주기만 하는 파괴적인 양육 이야기를 하였다. 이러한 양육의 근본 원인은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주는 자는 '받는 자'의 정신적인 요구와는 상관없이 자기의 욕구에 따르고 이를 충족시킨다는 점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
-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행동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완전히 바쳐야 하는 복합적인 행동이다. 다시 말하면 머리와 마음이 같이해야 한다. 사랑은 자기 희생이 아니다.
- 적절한 때에 주지 않는 것이 적절치 않을 때 주는 것보다 더 인정을 베푸는 것이다.
- 스스로 돌볼 능력이 있는 사람을 돌보기보다는 독립심을 길러주는 것이 오히려 사랑이다.
- 자신의 욕구와 화나는 이유 그리고 분노와 기대치를 표현하는 것은 자기 희생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정신 건강에 꼭 필요하다.
- 감싸주고 자기감정을 숨기는 것만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사랑에 포함된다.
우리는 보통 마조히즘과 사디즘을 순전히 성적 행동과만 연관시켜서, 신체적 고통을 받거나 가하는 데서 오는 성적 쾌락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보다 더욱 빈번하고 결과적으로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 사회적인 사도-마조히즘 현상이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성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거나 스스로 고통을 받는다. 이런 것들은 파괴적 행동 방식이다. 이런 것들 중에 도덕적 우월감을 갖고, 그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해 학대 받는 것을 정당화 한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이 학대 받음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고, 도덕적 우월감을 통해 복수하면서 즐기는 거다. 세상이 잘 대우해주면 세상에 복수할 필요가 없다. 복수 방법을 찾는 것이 생의 목적이라면 이러한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세상이 모질게 대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거다. 마조히스트는 학대에 대한 자신의 굴종을 사랑으로 본다. 마조히즘은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오해, 즉 사랑은 자기 희생이라는 오해를 부각시킨다. 마조히스트는 학대를 참아내는 것을 자기 희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스스로 필요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생각할 때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의 책임을 거부하고 있는 거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할 때에는 그것을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우리를 가장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기쁨을 안다. 사랑은 자기의 변화를 의미하지만, 이것은 자기 희생이라 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확장인 셈이다. 순수한 사랑은 자기를 채워 나가는 활동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축시키기 보다는 확대시키고, 자신을 메마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한다.
계속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을 구별하고 있는 거다. 그 구별은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가 질문해 보는 거다. 진정한 사랑의 경우, 그 목적은 항상 영적 성장이고, 사랑이 아닌 경우에는 그 목적이 항상 다른 것에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오해 하나를 더 살펴 본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는 거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느낌을 가지고선 그에 반응하여 무자비하고 파괴적인 태도로 행동한다. 한편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의식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애정 있고 건설적인 행동을 취한다. 뜨끔하다. 나도 사랑의 느낌으로 몇몇 사람들을 끔찍하게 잘 못 대한 적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느낌은 애착을 수반하는 정서이다. 애착 과정을 통해 상대가 중요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애착하게 되면 보통 '사랑의 대상'이라는 상대에게 자신의 일부처럼 에너지가 몰입된다. 그리하여 자신과 에너지 몰입 대상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를 애착 관계라고 부른다. 그러다 사랑하는 대상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잃게 되면, 대상에게서 투여된 에너지를 빼낸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탈 애착'이라고 한다. 애착과 사랑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일어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 우리는 생명이나 영혼의 유무와 관계없이 어떤 대상에 애착한다.
- 다른 인간에 애착한다는 것이 대상의 영적인 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 애착의 강도는 지혜나 헌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 애착은 떠다니는 것, 순간적인 것일지 모른다. 어떤 것에 대한 애착이 실현되면 바로 그에 대한 탈 애착이 일어난다.
반면, 진정한 사랑은 책임 있고 지혜로운 행동을 내포한다. 책임이란 서로 자기 느낌을 규칙적으로, 즉 일정하고 변함 없이,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관계에 관심을 갖는 거다. 진정한 사랑은 애착의 문제를 초월한다. 사랑은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과 상관없이 존재한다. 물론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을 동반한 사랑이 훨씬 재미있고 쉽다. 그러나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 없이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하려는 의지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보다는 의지에서 나온다. 사랑의 느낌에는 제한 없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끌리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의지로 이렇게 말 수 있다. "당신에게 사랑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사랑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누구에게 집중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고, 그를 향해 사랑의 의지를 집중해야 한다. 참사랑은 사랑으로 인해 압도되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책임감 있게 심사숙고한 끝에 내리는 결정이다. 사랑과 사랑의 느낌을 혼동하는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자기기만을 한다. 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이다. 사랑은 느낌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랑은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젠 어떤 것이 사랑인지를 알아 본다.
오늘부터 <인문 일기>라는 제목 대신에 <인문 일지>로 바꾼다. 어제 나는 동물과 달리 인간만이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인간이 스스로 개체성을 지닌 존재임을 드러내는 행위가 일기라는 거다. 일기는 자기 자신과 나누는 가장 사적인 대화이다. 일기의 유일한 독자는 자가 자신이어야 한다. 그래서 아침 글쓰기의 이름을 <인문 일지>로 바꾸었다. 일지(日誌)는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일지는 그날 그날의 일을 적은 기록이라면, 일기는 자신의 일상사를 기록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복잡한 상념을 정리하기도 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도 하고, 자신만의 고민과 딜레마를 적기도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매일 시 한편은 계속 공유할 생각이다. 근대적 삶은 우리에게서 시를 빼앗아 갔다. 우리가 정신적 어둠 속을 방황하는 것은 시인들이 언어의 올가미로 낚아챈 영원의 순간에 우리 일상을 비춰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뒷면/정현우
참외를 먹다 벌레 먹은
안쪽을 물었습니다.
이런 슬픔은 배우고 싶지 않습니다.
뒤돌아 선 그 사람을 불러 세워
함께 뱉어 내자고 말했는데
아직 남겨진 참외를 바라보다가
참회라는 말을 꿀꺽 삼키다가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
먼 사람의 뒷모습은
눈을 자꾸만 감게 하는지
나를 완벽히 도려내는지
사랑에도 뒷면이 있다면
뒷문을 열고 들어가 묻고 싶었습니다.
단맛이 났던 여름이 끝나고
익을수록 속이 빈 그것이
입가에서 끈적일 때
사랑이라 믿어도 되냐고
나는 참외 한입을
꽉 베어 물었습니다.
“세상에 흠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맛을 즐기다 흠을 핑계로 떠나는 건 사랑이 아니다. 상대의 흠마저 감싸주는 게 진정한 사랑이다,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 용서를 구하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참회가 필요한 건 떠난 사람이지만, 남은 사람이 눈을 감고 반성한다. 참회란 마음의 죄를 숨김없이 드러내 용서를 구하는 겸허한 태도다. 한결 성숙해진 시인은 “여름이 끝”나갈 즈음 참외 한입 “꽉 베어” 문다. (경향신문 김정수 시인)
어제는 오랜만에 고향 공주를 다녀왔다. 옛집을 재생하여 작은 책방을 하는 곳이 있다. "길담서원"이라 한다. 거기서 황규관 시집과 강남순 교수의 <<질문 빈곤 사회>>를 사왔다. 아침 사진은 그 책방의 한 모퉁이 놓인 액자를 찍은 것이다. "송무백열(松茂柏悅)"이 눈에 들어 왔다.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도 기뻐한다'는 뜻이다.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가 아니라, '사촌이 땅을 사야 나도 잘된다'는 말이다.
나는 몇 년 전, 황규관 시인의 다음 글을 읽고 걱어 둔 적이 있다.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회자되는, 즉 지극히 일반화된 논리와 어휘를 무비판적으로 구사하려는 욕망들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데, 나는 그것들을 '빅데이터가 되고 싶어하는 글쓰기'라고 부른다." 이슈에 대한 깊은 사유를 생략한 채, 독자들에게 아부하며, '좋아요'를 구걸하는 글들을 말하는 것 같다. 황규관 시인에 따르면, "그것은 인공지능 시대의 자본이 되려는 욕망에 가깝다. 진정 창의적인 글은 빅테이터가 되기를 거부하는 글이다. 이런 글쓰기를 '소수자 글쓰기'라고 부른다." 나도 '소수자 글쓰기'기 보다, '빅 데이터가 되고 싶어하는 글쓰기'를 부러워하곤 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자본의 노예가 아닌가 반성하며, 뜨끔했던 적이 있다.
스캇 팩(Scott Peck)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읽고 나면, 강남순의 책을 읽을 생각이다.<<질문 빈곤 사회>>, 이 책은 우리 사회와 이 세계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에 다양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이 책은 해답의 제시보다는 사유 체계로 초대하는 좋은 질문하기를 권한다. 좋은 질문은 우리의 호기심을 흔들어 깨우면서 보다 나은 나의 삼,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방식을 모색하고 성찰하며, 판단하고 행동하게 한다. 나는 이 책과 함께 올바른 질문 법을 학습할 생각이다. 강 교수는 '왜'라는 물음표를 허용할 때 진보와 변화 시작된다고 강조하며, 질문하지 않는 우리 사회를 안타까워 한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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