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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득도다조 (得道多助):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도와주는(助) 사람이 많은(多) 사람이다.

4년 전 오늘 글이에요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있지도 않은 정답을 구하려는 어리석음이나, 이젠 답을 얻었다는 안도감이 필요한 게 아니다. 투명하고 열린 미래 사회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 선택의 순간마다 함께 나누는 열린 질문과 자성의 노력이다. 이게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득도다조 (得道多助)"라는 말을 배웠다. 강한 사람은 힘이 센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엄청난 부를 소유하거나 학력이 높은 사람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도와주는(助) 사람이 많은(多) 사람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사람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 사람이 잘 되기를, 쓰러지지 않기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많으면 그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  지난 글들은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맹자는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많게 되기 위해서는 인심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평소에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득도다조(得道多助)'라 한다.  즉, ‘도를 얻은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평소에 남에게 많이 베풀고, 인간 답게 살았기에 그가 잘 되기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그 만큼 많다는 뜻이다.

여기서 ‘도(道)’란  사람의 마음이다. '득도(得道)'란 산에 가서  도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정치 지도자가  ‘도’를 얻었다는 것은 민심을 얻었다는 것이고 기업가가 '도'를 얻었다면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평소에 주위사람을 따뜻하게 대하고,  배려해 주었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평소에 사람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어제도 그런 사람들과 같이 운동하고 저녁 먹고, 주님까지 모셨다. 우리 집 가까이에 두 노인 분이 전통주를 직접 담가 파는 집이 있다. 실컷 먹고, 마시고 나오니 세상이 장맛비로 가득 찼다. 새벽에 일어나니 빗줄기가 장난이 아니다. 큰 피해가 없기를 바란다. 오늘 아침 시처럼, "가슴에 궂은 비 내리는 날은/함께 그 궂은 비에 적어주는" 것이 좋다.

장마/홍수희

내리는 저 비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고통 없이는 당신을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압니다
버틸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가슴에 궂은 비 내리는 날은
함께 그 궂은 비에 젖어주는 일,
내 마음에 흐르는 냇물 하나 두었더니
궂은 비 그리로 흘러 바다로 갑니다

오늘 아침으로 꼰대 이야기는 마친다. 마침 몇일 전에, 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님의 글을 읽었다. 제목이 "꼰대가 되지 않는 법"이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갈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진다는 점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마치 더 이상 모르는 게 없을 것 같았던 우물 안을 나와서 새롭고 신기한 별천지를 끝없이 주유하는 것과 같다.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던 것이 배움의 시작이었다면, 갈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다가 무언가를 비로소 하나라도 깨닫는 순간, ‘아, 이때까지 이걸 내가 몰랐었구나’ 하는 걸 역설적으로 배우게 된다. 결국 배움은 나의 아둔함을 나날이 깨달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 도대체 우리의 아둔함은 어디가 끝일까?

무언가를 배우려 하지 않고, 살던 대로, 하던 대로 살아가면 질문이나 의문이 생기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두 가지 끝없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우주가 그렇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아둔함이다. 하지만 우주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실하진 않다.’ 그래서 우리가 더 이상의 의문에 종지부를 찍고 어떤 사안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은, 결코 끝날 수 없는 온 세상을 모두 섭렵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 더 이상 배우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유학 중에 보면, 서양 학생들은 질문을 아주 편하게 하고, 교수 또한 쭈뼛쭈뼛 무척 미안해 하는 질문자에게 “어리석은 질문이란 원래부터 없네. 어리석은 답변들만 많을 뿐이지"라면서 학생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가끔 당돌한 질문이 불쾌함을 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액면 그대로의 질문을 넘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면서 저의를 의심받는 순간, 대화는 불가능 해진다. 실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말이 아닌, 정황과 분위기로 행간을 읽어내야 하는 '컨텍스트(context)' 사회의 전형이다. 문제 해결이나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공동의 고민이 아닌, 소모적인 신경전과 편짜기,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꼰대들의 사회가 그렇다. ‘나 때는 말이야’, ‘내가 한번 해봐서 아는 데’로 시작하는, 질문 자체의 무용론이 그것이다. 신념에 대한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누구나 나이와 무관하게 꼰대가 될 수 있다.

다음 문장은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그 요지는 알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번 90% 정도의 확신을 갖고 판단과 선택을 한다고 할 때, 단 10번이라도 모든 판단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확률은 0.9를 10번 곱한 것으로 약 35%가 된다. 물론 모두 틀릴 가능성도 0.1을 열 번 곱한 것으로 대단히 희박하지만, 매번 90%의 확신을 갖고 임해도 그 선택이 10회를 넘어가게 되면, 맞거나 틀릴 확률이 65% 이상이라는 얘기다. 매번 완벽한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한, 선택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 모든 것을 다 맞힐 확률은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더욱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요지는, 우리는 매번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 때마다, 그 이전까지의 선택의 결과들을 교훈 삼아 열린 질문들을 통해 실질적인 확률을 높이지 않은 이상, 늘 90%의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선택이 늘어날수록 꼰대가 되는 일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정답을 구하려는 어리석음이나, 이젠 답을 얻었다는 안도감이 필요한 게 아니다. 투명하고 열린 미래 사회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가 끊이지 않는 선택의 순간마다 함께 나누는 열린 질문과 자성의 노력이다. 이게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내가 다 맞지 않다. 열린 사고로 내가 틀렸음을 인지하고 자성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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