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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산수 몽괘 (3)

279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7월 29일)

<산수 몽괘>의 상괘 중 '육사'의 효사는 "六四(육사)는 困蒙(곤몽)이니 吝(인)토다"이다. '육사는 몽매함에 곤궁하니 인색하도다'란 뜻이다. 음(陰)인 네 번째 육사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나 홀로 스승에게서 멀어진 상태이다. '초육'과 '육삼'은 '구이' 양효와 가깝고, '육오'는 '구이'와 잘 응(應)하고 있으나, '육사'는 스승인 '구이'와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응(應)하는 관계인 '초육'도 몽매한 음이다. 그래서 배우고자 하여도 스승을 찾을 수 없는 곤궁한 상태이니 인색하다. 마치 가정형편이 어려워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하고 독학(獨學)하거나, 참다운 스승을 찾지 못하여 어렵게 공부하는 것과 같다.

이 음효는 '육삼'와 '육오'의 양쪽 다 음효의 사이에 끼어있다. '구아'와 '상구'의 두 양효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따라서 나는(음효)로 몽매한데, 나의 몽매를 깨우쳐 줄 좋은 선생을 만날 길이 없다. 일생,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서 곤궁하게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困蒙, 곤몽).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吝, 인). "곤궁"에서 '곤'이 '몽'을 받는 타동사로 보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곤궁하게 한다'고 읽으면 된다. 이 효를 만난 사람은 조력자를 만날 수 없다. 실제 우리 주변에 이런 청소년들이 꽤 있다. 자기 안에 갇혀서 배우기가 힘들다. 홀로 멀리 떨어져 있다. 지폐증 같은 마음의 감옥에 갇힌 아이들은 교실에서 공부할 수 없다. 자연 속에서 배워야 한다.
 
<소상전>은 "象曰(상왈) 困蒙之吝(곤몽지린)은 獨遠實也(독원실야)라"이다. 이 말은 '상전에 말하였다. 곤몽의 인색한 것은 홀로 실상에서 멀어서이다'로 번역된다. '육사'는 홀로 실상, 즉 스승인 '구이'인 양(陽)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곤궁하고 인색한 것이다.

"곤몽"은 자기 안에 갇힌 아이들을 만나는 교육이다. "곤(곤)"이라는 글자는 나무가 울타리 안에 갇힌 모습이다. 오늘날 자기 안에 갇ㅎㄴ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폐, ADHD, 운둔형 외톨이 같은 부조리 현상에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만났던 유전자 장애나 정신지체 장애 아동과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현대 사회의 경쟁 체제, 물질만능주의, 자본주의의 폭력 등으로 인한 부조리이므로 개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문제를 아이들이 대신 앓고 있는 것이다. 곤몽의 아이들은 공부가 아니라 치유가 필요한 아픈 아이들이다.
 
"六五(육오)는 童蒙(동몽)이니 吉(길)하니라"가 효사이다. 이 말을 번역하면, '육오는 아이의 몽매함이니 길하다'이다. '육오'는 양 자리에 음으로 있으나, 외괘의 중(中)을 지키고 있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린 몽괘의 상황에서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니, 응(應)하고 있는 스승 '구이'에게 순하게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육오'의 효사는 감결하고 아름답다. "동몽길(童蒙吉)"이다. 어린이의 어두움을 아름답다. 이 음효는 양위(陽位)의 자리에 있으며 상괘의 중정이지만, 이 음효는 부드러움과 어두움, 그리고 유연함과 가능성, 계발성을 끝없이 함장한 순결성을 상징한다. 어린아이의 속성이 아닐까?  어린이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단지 어두울 뿐이다. 아직 노출이 안 되어 어두울 뿐이다. 어린이는 무식하지 않다. '무식하다'는 말은 어른들의 애곡에만 사용하여야 한다. 그런 경우를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본다.

인간이 자신이 경험한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처사(處事)를 우리는 '무식'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무식을 막기 위해 공부를 한다. 공부를 통해, 우리는 나와 다름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학교에서의 공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자연의 오묘함,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배우는 혜안을 포함한다.

내가 살고 세상은 내가 스스로 변혁할 때, 비로소 변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변혁은 외부의 권위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식한 것이다. 자기 변혁은 자기가 누군인지 알려는 수고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올바른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없고, 자기 변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서 시작한다. 나는 내가 오늘 마주치는 정보들과 사람들을, 내가 경험하여 획득한 나의 시선이라는 색안경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편견을 가진 내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이 자신이 누군인지를 알게 하고, 더 나아가 자유로운 인생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신념과 이념처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는 것은 없다고 나는 믿고 있다. 반면, 자기 인식을 통해 얻은 자유는 나에게 자연을 편견 없이 탐색할 수 있는 여유를 선물한다. 자유로워야 조급해 하지 않고, 초조해 하지 않고, 여유를 갖게 된다. 

어린이는 '몽(어둡다)"하지만 계발을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어린이'를 제왕의 자리에 올려놓은 <<주역>>의 통찰력은 놀랍다. '어린의 어두움은 길할 뿐이다. 니체의 '아이 정신'이 소환된다. "어떻게 하여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 문장을 사람들은 '인간 정신 발달의 3 단계'라고 말한다. 
1. 1단계: 낙타의 정신-낙타는 인내와 순종의 대명사로, 낙타의 정신이란 사회적 가치와 규범을 절대적인 진리로 알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정신을 말한다. 무엇이 진정한 삶인지에 대한 고뇌도 하지 않은 채 기존의 사회가 정해준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삶을 "세상 사람의 삶(자기를 상실하고 세간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빠져 있는 삶)"이라고 하며, 니체는 "말세인의 삶(밑바닥까지 전락한 인간의 삶)"이라고 했다.
2. 2단계: 사자의 정신-기존의 가치를 파괴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3. 3단계: 아이의 정신-놀이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산다. 삶을 유희(놀이)처럼 사는 것이다. 그것도 재미있는 놀이이어야 한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다. 아이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매 순간 충만한 기쁨을 느끼면서 경쾌하게 산다. 삶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다는 말이다. 
▪ 매일매일 다가오는 일상의 무게를 느끼지 말고, 경쾌하게 처리한다.
▪ 매 순간 자체가 충만한 의미를 갖고 있기에 그 순간의 충일함(가득차서 넘침)을 즐기며 산다.
 
'육오'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童蒙之吉(동몽지길)은 順以巽也(순이손야)일새라"이다. 이 말은 '상전에 말하였다. 아이의 몽매함이 길한 것은 순하고 공손하기 때문이다"로 번역된다. TMI: 順:순할 순   巽:공손할 손. 외괘가 '간상련 ☶ 산'으로 산처럼 후덕한 가운데, '육오' 음효가 변하면 외괘가 '손하단 ☴ 바람'으로 되니 겸손하게 중도를 지켜 나가는 상이다. 쉽게 말해보면, 맑고 밝고 순수한 아이들을 가르친다. 훈훈한 바람처럼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맨 위에 있는 "上九(상구)는 擊蒙(격몽)이니 不利爲寇(불리위구)오 利禦寇(이어구)하니라"가 효사이다. 이 걸 번역하면, '상구는 몽매함을 치니, 도적이 됨이 이롭지 않고 도적을 막음이 이롭다. TMI: 擊:칠 격   寇:도적 구   禦:막을 어.  '상구'는 몽괘의 마지막 음자리에 양으로 와 있고 중을 얻지 못하여 지나치게 강하게 할 우려가 있다. <몽괘>에서는 '상구' 양과 '구이' 양이 유약하고 몽매한 음을 다스리는 역할을 하는데, '구이'는 스승으로 서의 역할을 하고 '상구'는 몽매한 자들을 선도해야 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몽매함을 친다(擊蒙)’고 했는데, 이는 '상구' 양이 몽매한 음효들이 교육을 잘 안 받고 탈선행위(도적질)를 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상구'가 음효자리에 양효로 있기 때문에 지나치다 보면, 오히려 '상구' 스스로가 도적질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도적이 됨이 이롭지 않다’고 하였다.
 
이 자리의 양효는 양강(陽剛)하며 부중부정(不中不正)하다. 도올 김용옥 교수는 좀 다르게 해석한다. "그러니 아주 강력한 불량학생을 지시하고 있다. 이 불량한 학생을 다스리는(擊=차다) 방법(擊蒙, 격몽)은 이렇다. 도둑이 되어 쳐들어가듯이 강압적인 방법으로(爲寇,위구) 제압만 하려하면 별 효과가 없다(不利, 불리). 오히려 도둑을 방비하는 방법으로(禦寇, 어구) 주도 면밀하게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내부에서부터 고쳐가야 한다." 교육의 방법이 '도둑처럼 되지 말고, 도둑을 방비하라' "격몽은 위구가 아니라 어구라는 거다." 이는 엄벌주의(disciplineism)와 관용주의(tolerance)의 균형이 <<주역>>, 동아시아의 교육 철학이었다.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성폭행하지 말라'같은 기본적인 도덕과 시민질서는 때려서 라도 가르쳐야 하지만, 그가 도둑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거다. 때려서 라도 가르쳐야 할 것은 가르쳐야 하지만, 그걸로 인해 성정이 비틀어져 완전히 빗나가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엄하게 가르치더라도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상구'의 <소상전>은 "象曰(상왈) 利用禦寇(이용어구)는 上下(상하) 順也(순야)라"이다. 이는 '상전에 말하였다 도적을 막음이 이로운 것은 위와 아래가 순해서이다.' 몽매한 자가 교육을 잘 받을 수 있게 탈선행위(도적질)를 막는 것이 이롭다고 한 것은 위(외괘)와 아래(내괘)의 모든 음효들이 순하기 때문이다.


<산수 몽괘>를 마치며, 괘사를 다시 읽어 본다. 왜냐하면, 한 권의 교육학 책을 읽은 것 같기 때문이다. "蒙(몽)은 亨(형)하니 匪我(비아) 求童蒙(구동몽)이라 童蒙(동몽)이 求我(구어)니 初筮(초서)거든 告(곡)하고 再三(제삼)이면 瀆(독)이라. 瀆則不告(독즉불곡)이니 利貞(이정)하니라"이다. 이 말은 '몽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어린 아이)을 구하지 않고 동몽이 나를 구하니, 처음 점치거든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하면 더럽힌다. 더럽히면 알려주지 못하니, 바르게 함이 이롭다.' 이를 현대적으로 다음과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형통하다. 내가 싹수가 노란 아이를 돕는 게 아니라, 그 아이를 통해 내가 구원 받는다. 점을 칠 때 처음은 알려주지만 믿음이 없이 두 번 세 번 하는 것은 모욕을 하는 것이다. 모욕하면 알려주지 않는다. 바름을 지켜 이롭다."(김재형)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교육은 배우는 사람이 중심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내가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서 배운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점을 칠 때 신중하게 질문하듯이 배우는 사람은 깊이 생각하고 질문해야 한다. 한 번 가르친 걸 두 번 세 번 묻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어느 날 '내가 아이들에게서 배우고 있구나' 하는 자각이 일어나면 그는 완전히 다른 교사가 된다. 이 자각이 일어나면서 교사는 싹수가 노란 아이가 본래 싹수가 노란 것이 아니라, 자기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다 보니 싹이 노래진 것이라는 게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아이를 다 품으려고 해서 안 된다고, <몽괘>는 말한다. 따끔하게 혼내는 것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만나야 하는 아이들은 정도가 심하다. 싹수가 노란 아이들이 자기를 죽이는 게 아니라, 이제는 분노를 공공연하게 그것도 오랫동안 왕따놀이를 통해 익힌 방식으로 자기보다 약한 대상을 공경한다.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싹수가 노란 아이들은 연민의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잇지만, 독기를 품은 싹을 가진 아이들은 어떻게 만나야 할지 쉽지 않은 현실이다.

<몽괘>의 괘명이 '산수몽'이다. 산 아래에서 솟아나는 샘물의 모습을 통해 공부는 내 속에서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샘 솟아날 때 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자발성 교육이다. 따라서 학생도 교사를 대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점을 친 하늘을 향해 또 내 안의 무의식을 바라보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점을 구할 때의 질문은 신중할 수밖에 없고, 오랫동안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 다음에 비로소 점을 쳐서 답을 구한다. 이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괘을 얻었다고 해서 두 번 세 번 하지는 않는다. 공부하는 학생의 마음에는 이런 게 필요하다. 교사에게 무조건 베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한 다음 선생님께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문제를 가지고 또 물ㅇ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답을 줄 때 제대로 듣지 않는 것으로, 교사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고, 자기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교사에게만 의지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멈춘다. 대신, 어쨌든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으며, '내 안의 어린 아이'를 되찾아야 겠다.


질문의 책/파블로 네루다(정현종 역)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 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쫓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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