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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오늘 사진처럼, "창백한 푸른 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 무대이다.

3년전 오늘 글입니다.

인문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1년 7월 29일)

사진 구글에서 캡처: 가운데 있는 "창백한 푸른 점"(칼 세이건)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부탁으로 우주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에서 600억 km 떨어진 거리 촬영한 지구 사진을 전송하였던 것이다. 칼 세이건의 말을 공유한다.  "저 점이 우리가 있는 곳입니다. 저곳이 우리의 집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당신이 아는, 당신이 들어본 그리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저 작은 점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지구는 생명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인류가 이주할 수 있는 행성은 없습니다. 잠깐 방문할 수 있는  행성은 있겠지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아직 없습니다. 좋든 싫든 간에 당분간 지구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야만 합니다. '나에게 이 사진은, 우리가 서로를 더 배려 해야 하고,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의 터전인 저 창백한 푸른 점을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강조입니다." (칼 세이건)

어제부터 기술지(技術知)로서의 지식, 문명지(文明知)로서의 지성, 자연지(自然知)로서의 지혜, 이 셋을 구별하고 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노예였다가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50-135년)의 글을 만났다. "세상에는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조절할 것들이 있고,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만사에 대한 의견, 삶의 목적, 욕망, 혐오 같은 것으로 우리의 행위로 결정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것은 재산, 명성, 권력과 같은 것으로 우리의 행위로 결정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엔케이리디온>)

그리스어로 엔케이리디온은 '손쉽게 손으로 들고 다녀야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길 위해 몸에 손쉽게 지니고 다니는 무기인 '단검(短劍)'을 이렇게 불렀다. 에픽테토스가 자신의 책에 이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보장하는 지혜를,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얻은 것들을 그 책에 모았기 때문 같다. 나는 이 책을 <마음의 수첩>이라 부르고 싶다.

어쨌든 지혜는 앞에서 말한 둘을 구분하여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을 수련하여 고요함과 평상심 그리고 행복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을 소유하려고 평생 수고하다가 십중팔구 씁쓸한 최후를 맞이한다. 우리들의 삶 속에는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것들, 예를 들어 갑작스런 사고,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 감병병 혹은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들이 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 사고 자체가 아니라, 그 사고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 중에 하나가 자기-자신을 이기심이라는 경계를 초월하여 저 높은 경지로 올라 탁월한 사유의 시선으로 '줌-아웃'하여 자기 자신을 관조하려는 시도이다. 줌-아웃은 에픽테토스가 말한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부, 명에 그리고 권력의 유혹을 약화시키고, 1인칭과 2인칭(나와 너), 더 나아가 1인칭과 3인칭(나와 그 혹은 그것)의 구별을 점점 모호하게 만들어, 하나로 융합한다. 배철현 교수의 표현을 공유한다. "'나는 나'일 뿐만 아니라, '나는 너'이며, '나는 결국 그것'이 된다. 내가 너가 되는 과정이 연민이며, 내가 그것이 되는 깨달음이 해탈이다." 천천히 나누고 구별하며 읽어야 한다.

오늘 사진처럼, "창백한 푸른 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 무대이다. 게다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물이었다. 그 후 알 수 없는 신비로 육체와 정신을 지닌 인간으로 잠시 살다가, 자신도 예약할 수 없는 시간에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오늘 공유하는 시는 <경향신문>에서 만났다. 이 시는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말로 유명한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을 소재로 하고 있다. 갈매기 조나단은 단지 먹을 걸 구하기 위해 하늘을 나는 게 아니라 비행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자아를 실현하고자 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위대한 비행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한다. 시인은 “알 대신/ 발자국”에 눈길을 준다. 지상에 남긴 발자국은 비상을 위한 첫 흔적이다. 태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 시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은 이런 말로 덧붙임을 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평범한 삶도 나쁘진 않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일,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평범한 삶. 하지만 청춘이라면 “황금 심장을 얻”기 위해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라야 한다. “날개가 타서 추락”하거나 “눈멀어 길을 잃”을지라도 끊임없이 도전해야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한계를 극복하고 “태양의 품까지” 도달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활짝 열어 젖힐 수 있다."

그래 오늘은 어제에 이어, 고미숙의 유투브 강의 "에로스와 로고스의 향연"을 듣고, 그걸 책을 엮은 것도 읽고, 우리들의 "욕망과 비전 탐구" 두 번째 시간을 가지려 한다. 마침 코로나-19의 4차 유행으로 거리두기 4단계로 세상이 조용하다. 이 조용한 시간에 "에로스적 충동과 로고스적 비전의 결합"을 탐구해 본다. 오늘 공유하는 시인 이호준은 나와 페친이다. 시인이 담벼락에 글을 올리면 재밌게 읽는다.

갈매기 태양까지 날다/이호준

어떤 갈매기는 젖은 모래 위에 알 대신
발자국 몇 개 낳아 놓고 떠나는데 그런 날 바다는
파도를 저만치 밀어 놓고
발자국이 부화되기를 기다린다
새벽에 발자국을 깨고 나온 새끼의 이름은
대개 자유 혹은 조나단이라 지어지게 마련인데
황금 심장을 얻기 위해 그들은
여명을 딛고 해를 향해 힘차게 날아오른다
더러는 날개가 타서 추락하고
더러는 눈멀어 길을 잃지만
몇몇은 태양의 품까지 무사히 도착하는데
비상이 멈춰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밤이면 백사장은 다시 알 대신 발자국 몇 개 품고
반짝이는 별들을 향해 손 모은다
바다가 초조한 얼굴로 밤새 서성거린다

내가 세상을 알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 경제는 계속 위기라고 들었고, 세상은 어둡고 올해가 가장 위기라고 했었다. 그래 그걸 믿고 올해만 넘기면 괜찮을 줄 알고, 계속 참았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하다. 언제부터 우리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살 수 있을까? 아직도 화폐와 노동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그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출구를 찾아 본다.

고미숙은, 노동과 화폐로부터 탈출 하려면, 자연, 생명 그리고 우리의 몸 같은 근원적인 문제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리 호이나키는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서 오늘날 권력과 부와 상상력과 지성과 문화생활을 조직하고 독점하려는 기관들은 다음과 같은 세 종류의 분리 혹은 고립을 만들어 낸다고 지적했다. 사람을 그 육체, 즉 몸과 장소와 시(詩)로부터 떼어 놓고자 노력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조금만 되돌아 보면,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1) 육체의 연장(延長)이라 할 수 있는 도구 생활자인 우리는 몸으로부터 점점 소외되고 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근대적 지각과 운동 양식에 갇혀 있을수록 직접적 감각 체험으로 부터 더 멀어지게 마련이다.

(2) 우리 몸이 머무는 일상의 자리, 곧 장소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장소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소외라는 말은 장소와 소통하거나 서로 교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일상을 벗어나곤 한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그 장소가 갖는 이야기와 기억들과 접촉을 유지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풍요로움 속에서도 내면이 빈곤한 것은 그 때문이다. 골목이 사라졌다. 누추하지만 각박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얼굴 빛 환하고, 삶이 고달파도 어울릴 줄 알았던 그 세계가 사라졌다. 김기석 목사의 <일상의 순례자>라는 책에서 만난 이야기들이다. 김기석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마음의 장벽을 자꾸만 높이며 살아가는 부박하고 희떠운 삶은 겵코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니다.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3) 세번 째로, 근대적 삶은 우리에게서 시를 빼앗아 갔다. 우리가 정신적 어둠 속을 방황하는 것은 시인들이 언어의 올가미로 낚아챈 영원의 순간에 우리 일상을 비춰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 속에서 고미숙의 유튜브 강의 "에로스와 로고스의 향연"을 들었던 것이다. 고미숙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몸은 외모하고 수치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는 몸무게나 키 같은, 숫자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늘 그 몸매를 조이고 사람들에게 섹시하게 보이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이느라 바쁘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도구화 되고 있다.

나는 헤르만 헤세에 나오는 다음 문장을 좋아한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천직)이란 다만 한가지였다. 즉 자기 자신에게 로 가는 것. (..) 누구나 관심 가질 일은, 아무래도 좋은 운명 하나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는 것이며, 운명을 자신 속에서 완전히 그리고 굴절 없이 다 살아내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은 "나를 행해 쉼 없이 걷는 일"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걸으면서 숙고하는 일이다. 무엇을 숙고하는가? 바람직한 일보다 내가 바라는 일을, 해야만 하는 일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은 일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담론을 바꾸어야 한다. 이젠 자연, 생명, 우리의 몸, 우리의 무의식,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삼을 때 그곳에 어떤 지도가 그려지는지를 봐야 한다.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는 곳에서 살지 않는다. 어디를 가도 시간과 공간이 다 사계절로 펼쳐진다. 그래서 이 세상이 사계절이라면 인생도 사계절이다. 청춘, 중년, 장년, 노년, 이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청춘(靑春)들이 무기력하다. 청춘에는 봄 춘(春)자 들어간다. 봄은 얼어붙은 땅을 뚫고, 온갖 초목들이 막 솟아오르는 스프링(spring)이다. 변화를 바라는 봄의 생명력을 우리는 에로스라고 한다. 이 에로스가 동력(動力)이다. 그런데 이 사회의 청년들은 봄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고미숙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원인이라 생각한다.
(1) 제도, 즉 규제가 너무 많다. 청춘들을 과도하게 어린이 취급한다.
(2) 서비스와 케어가 또 지나치다. 너무 많은 것을 즐기라고 부추긴다. 돈만 가지고 가면, 어디나 그냥 막 흥청망청 쓰라고 유혹한다. 소비를 창피하지 않게 한다.

우리 청춘들은 (1)과 (2)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힘들어 한다. 학교에선 스트레스가 엄청 쌓이고 인터넷이나 TV를 보면 상품들이 엄청 유혹한다. 예를 들어, 몇 개월 알바로 돈을 모았다가 한 방에 지르는 변태에서, 돈이 떨어지면 삶을 지루해 하는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이런 상황으로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은 능동적으로 사는 일이다. 수동적이지 않고, 자율적이여야 한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자신의 삶에 주인이 아닌 사람은 ㅣ그냥 열심히 앞만 보고 사는데,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고미숙은 이런 사람을 '좀비'라 부른다. 좀비는 몸을  잘 못 움직이지만 열심히 앞으로 가고, 또 구강 구조가 발달해서 먹고 물어뜯는 데 강하다. 그러다  보니, 청춘의 에로스가 침묵하고 있다. 청춘으로 못 살며 무기력하고 공허해 하는 것이다.

에로스와 로고스 이야기는 내일로 미룬다. 다른 글들은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을 누르시면 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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