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오늘 글입니다.

와인 파는 인문학자의 인문 일기 (2021년 7월 13일)
매주 월요일에 나오는 <배철현의 월요묵상> 칼럼을 즐겨 찾아 읽는다. 오늘 아침 <인문 일기>는 거기서 영감을 얻고, re-writing한 글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늘 깊이 숙고하는 일상을 산다. 왜냐하면 실제로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거나 일어나더라도 그 파급을 줄이기 위해서 이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늘 행운에 기대거나, 최선의 상황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으며, 희망만 할 뿐이다.
세네카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실제로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세네카는 인생을 마감하며 쓴 '루킬리우스에게 보낸 도덕편지' 74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언제나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으로 제 자신을 준비시켜왔습니다. 만일 내가 악(불행)을 미리 숙고하고 준비했다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 내 충격은 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행운을 신봉합니다. 그들에게 인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갑작스럽고 상상할 수 없고 신기합니다. (...)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그런 최악의 상황이 가져다 주는 고통을 깊은 숙고를 통해 경감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것을 실제 경험으로 처절하게 견딥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런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경우, 우리는 그 충격을 상당히 경감할 수 있다. 반면 우리가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는 순진하고 긍정적인 사고에 안주한다면, 불행은 더 많은 고통을 유발시킬 수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불행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욕망은 한이 없어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심히 수년 동안 정성을 쏟아 획득한 물건이나 사람은, '세월'이라는 괴물에 굴복하여, 나의 욕망의 대상에서 떨어져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만족감을 주기보다는, 지겨움으로 전락한다. 우리는 그 대상보다 욕망을 더 자극하는 새롭고 화려한 것을 찾기 시작한다. 심리학자들은 그런 심리를 '쾌락 적응'이라고 부른다.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욕망의 재배치이다.다시 말하면, 욕망의 '건너 가기'를 해야 한다. 어떻게? "쾌락에서 지성으로, 중독에서 영성"으로 건너가야 한다. 아무리 멋진 자동차나 명품가방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시시해진다. 더 좋은 자동차와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 쾌락적응은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 관계를 맺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의 장점이 아니라 약점에 대해 '깊이 숙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쾌락적응을 통해, 만족이 불가능한 쳇바퀴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한다. 인간은 실현이 불가능한 욕망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불행하다. 우리는 한 가지 욕망을 실현시켰을 때,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욕망은 진부한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배철현 교수의 <월요묵상>에서 배웠다. 그래서 스토아철학자들은 라틴어로 '프라이메티치오 말로룸'(præmeditatio malorum), 즉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생각 하기'라는 특별한 사고 훈련을 했다고 한다. 흔히 '부정적 시각화'라고 번역되는 용어다.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는 '명상록' 11권 34단락에서 철학자 에픽테투스를 인용하면서 이 훈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한다. "에픽테토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에게 입 맞출 때, 당신은 마음속에 이렇게 중얼거리십시오. '내일 너는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불길한 말이 아닙니다! 그(에픽테로스)는 말합니다. 자연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은 불길하지 않다. 불길하다면, 추수된 옥수수에 대해 말하는 것도 불길할 것이다."
오늘 부터 나도, 에픽테토스의 조언에 따라, 딸의 죽음에 대해 종종 상상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아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기뻐할 것이다. 이젠, 그의 조언에 따라, 가족 뿐만이 아니라, 친척, 친구, 더 나아가 직장 동료에게도 적용하여 본다. 그러면 나는 나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만나는 순간을 영원으로 전환시키려 노력할 것이다. 이 길이 하루를 순례자의 길로 나아가는 방법일 수 있다고 본다.
내가 말하는 순례자의 길은 타인들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깊은 내면과 만나고, 자신의 마음을 해방시키는 길이다. 오늘도 길을 떠나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시, 공간을 만나고, 거기서 오는 낯섦, 설렌 그리고 충격들이 일어나가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순례자이고 구도자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물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지만 정신의 확충이나 인식의 자유에 대해선 대체로 무관심하다. 가치에 대한 사유, 삶에 대한 탐구는 게을리 한다. 그러나 철학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철학은 내 행동과 일상과의 관계, 나아가 삶 전체를 규정하는 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를 보는 눈능ㄹ 바꿔야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감정이나 유행에 휩쓸려서 뭘 하게 되면 금방 식어 버린다. 오래가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이든 인생이든 웜가를 바꾸려면 관점이나 인식의 전황이 있어야 한다.
힘들 때면 나도, 오늘 공유하는 시인처럼, 단어를 딸에게 거꾸로 말한다. 용조! '조용히 하라는 말이다. 이 식를 소개한 김정수 시인에 의하면, "삶의 색깔과 모양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환경에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그 무늬는 많이 달라진다. 가난이나 질병, 불화로 시작된 인생 여정이라면 유년 시절부터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막막할 것이다. 내 편이 돼 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어떻게 견뎌야 할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거나,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미친 듯 일에 파묻히거나, 먹지도 않고 잠을 자거나 한다."
시인도, 나처럼, “단어를 거꾸로 부”른다. 바람 대신 "람바 람바 람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는 바람이 아닌, 무언가를 바란다는 바람이라는 말에선 시원함보다 끈끈함이 묻어난다. 반면 ‘람바’라는 말에선 경쾌한 람바다 리듬이 느껴진다. 극과 극의 감정이다. 시인은 아버지의 악업을 상속받아 가슴에 구덩이를 팠다 메우는 일을 반복한다. 언덕 정상에 이르면 바로 굴러떨어진 무거운 돌을 다시 정상까지 밀어올리는 시시포스의 형벌을 떠올리게 한다. 산다는 건 “아슬아슬하고 미안하고 죄스럽고 낭만적인”, 참으로 복잡다단한 일이다. 하루하루가 익숙한 것 같지만, 늘 낯선 풍경이다. 그래도 순례자의 마음으로 오늘도 하루의 길을 간다. 순례자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날 그날 감사해 하면서, 그리고 나눠 가지면서 삶을 산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순례자처럼 살아간다.
바람/송진
힘들 때는 단어를 거꾸로 부르지 그러면 마음이 조금 고요해져 람바 람바 람바 상처는 오래된 거야 아마 태어나기 직전, 태어나고 바로일지도 아버지는 간디스토마였지 내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 병 낫게 해달라고 빌었대 아버지는 병 나았지 아버지는 병 나았지 나는 평생 그 빚 갚느라 세상의 구덩이란 구덩이는 다 메우고 있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병을 얻었지 그래도 죽지도 않아 아직 더 파야 하는 구덩이가 있대 더 이상 업을 짓지 말자 별을 한 마리 데려다 키우자는 네 말에 람바 람바 람바 사는 건 새벽의 흰 욕조에 기어오르는 흰 아기 거미를 휴지로 돌돌 말아 옥상에서 떨어뜨리는 아슬아슬하고 미안하고 죄스럽고 낭만적인 노을의 기지개
하비 콕스는 신학자는 "현대인의 우상은 출세"라 했다. 출세는 돈과 명예와 권력으로 지환됨을 알기에 사람들은 출세에 집착한다. 출세를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니 고요함을 잃게 된다. 고요함 습관들이고, 고졸함을 기른다는 '습정양졸'의 정신이 필요하다. <장자>에 "감어지수"라는 말이 있다. 흐르지 않고 고요한 물에 사람들은 거울 삼아 자신을 비추어 본다는 말이다.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춰 볼 수 없는 것처럼 고요한이 없는 마음에 우리의 모습은 비쳐지지 않는다. 나는 주말 농장이란 이름인데, 주중에 그곳에 가면, 영문 모른 환대인 고요함을 맛본다. 그 무조건적인 환대는 애 영혼의 깊은 곳을 툭 건드리고, 고단하고 외로운 나를 쉬게 한다. 진정한 쉼은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카프카가 그랬다. 평안, 정적, 휴식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 성급함은 인류의 중죄라고 말이다. 우리는 자기 짐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살아간다. 그 짐을 내려 놓으려면 침묵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문제는 소란에 길들여진 영혼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침묵의 길에 들어서려면 세상을 행한 감각의 창문을 모두 닫고, 자신의 내면만을 응시하면서, 어떤 '은밀한 소리'를 들어야 하다. 그 소리를 들으려면 침묵이 필요하다. 숭고한 자신을 찾아가는 순례자에게는 고요와 침묵 그리고 경청이 필요하다.
고요를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유혹하는 외부의 소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사소한 생각에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인다. 그는 듣기 위해 침묵을 유지한다. 사실 듣기와 말하기는 서로 배타적이며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다. 듣기를 수련한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하기에 급급하다. 주의 깊게 들을 수 잇는 사람만이 상대방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경청을 통해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가야 가능하다. 여기서 무아에 방점을 찍는다. 영어로 말하면 타자 중심적 듣기인 'listening' 이다. Listen은 자신이 듣고자 하는 대상 앞에 전치사 to 가 놓인다. 그러므로 '리스닝'은 상대방의 말에 나의 귀를 가져다 대는 노력이 필요하다.말 그 대로 '경청(傾聽)'이 필요하다. 이는 자기 중심적에서 벗어나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과 귀를 쭉 뻗어내려는 수고가 동반되어야 한다. 반면 영어 단어 hearling은 자기 중심적이다. 히어링은 상대방의 말을 흘려 듣는 낮은 수준의 듣기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말만 취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를 헤아릴 수 없다.
순례자를 다른 말로 하면, 구도자이다. 언젠가 한 번 공유했던 박노해 시인의 <깨져야 깨친다>를 소환한다. "한 구도자가 스승에게 물었다/진리의 길로 가려면 어찌해야 합니까//선하고 의로운 벗들과 함께 가라/좋은 벗들과 함께하는 것이/진리의 길의 전부이다//어찌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까//너를 위해 깨닫겠다는 너를 깨라/
자신을 깨뜨리면 깨달음이다/아니오!로 맞서 깨져야 깨친다/제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스승은 막대기로 줄을 하나 좌악 긋더니/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거라/자비의 마음으로 크게 울어라"
구도자는, 일상에서, 선행을 보이며 선행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배철현 교수는 구약성서의 <미가서>를 인용하며, 선행이란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추구하며, 겸손하게 네가 만난 신이 요구한대로 생활하는 것"(<미가서> 6:8)이라 했다. 구도자가 되기 위해, 미가는 우리가 가장 매력적인 향기를 잔잔하게 내뿜을 수 있는, 인향(人香)의 비밀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해주었다. 늘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동물적인 인간에게서 신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본다.
• 정의 실천하기
• 자비 희구하기
• 겸손 생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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