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비 맞는 전문가/최정례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두 가지 생각이 머리 안에 꼬여서,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하나는 돈키호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리빙랩(living lab.)이다. 오늘 오후에 <초연결시대, 인간을 말하다> 제7강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이 나올 당시 피레네 산맥 너머의 나라들은 교회와 수많은 봉건 영주의 횡포에 시달렸던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를 거치는 동안, 그들은 인간이 자유인임을 자각하고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전통보다 개인의 사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맛보고, 신과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고자, 또한  무지했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세상을 바로 알고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데 열심을 다하였다.

어떤 가문의 사람인지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지가 중요했던 다른 유럽 사람들과는 다르게, 스페인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혼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왕과 왕의 권한을 위임 받은 귀족들이 축제와 사치와 부패로 국고를 탕진하고, 중남미 무역으로 돈을 번 상인들은 교역을 하기 보다 땅 매입에 자금을 쏟아부며, 상류층은 대규모 사업에서 벗어나 임대 수입이나 연금으로 살았다.

순혈주의 때문에 유대인들이 도맡아야 했던 직업은 누구도 하지 않으려 한 데다 일을 하면 명예를 잃는다는 사고까지 겹쳐 노동을 경시한 결과 땅은 황무지로 버려지고, 기술이 없어 목축으로 얻은 털은 원자재로 수출되어 비싼 완제품으로 수입되었다. 똑똑하면 유대인이라는 여론 때문에 무식이 자랑거리가 된 세상은 배고픔에 시달리는 시민과 일자리가 없어 방황하는 부랑자로 넘쳐 났다.

인간의 자유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생각과 노동이 죽음의 덫인 나라, 이런 모순 투성이의 스페인 현실에 대다수 지식인들은 눈을 감고 잘 나가던 자신들의 펜을 꺾었지만, 세르반테스는 그 현실을 미학으로 투영하여 인간다운 세상을 열어 보인 것이다. 그래 『돈키호테』는 읽으면 읽을수록 흥미롭다. 그는 권력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잘못된 종교의 가르침에 도전하며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특권층을 붕괴시키는 일을 미학적으로 이루어 냈다.

'읽기'란  자기 자신만큼 읽는 것이다. 같은 책을 읽어도, 각각의 개인은 자신이 지닌 가치관, 세계관, 최근에 자신이 씨름하는 물음들 그리고 살고자 하는 삶의 방향 등에 따라서 하나의 책으로부터 각기 다른 것들을 얻는다. 책을 안 읽는 사람들은 그리 깊게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그러니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손익을 잘 '계산하고', 이해관계와 감정에 따라 '의심'은 할지 언정, 근본의 이치를 헤아리고, 삶의 방향을 세우는 '사유'는 하지 않고 살아간다.

책을 읽지 않고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에 밴 편견과 습관에 안주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한 종교, 이데올로기, 물질적인 욕망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며 매일 매일을 연명할 뿐이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의 "비 맞는 전문가"처럼.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하기로 돈키호테가 촉발시킨, 내 머리를 가득 채운 리빙랩, <신성동 학습공원@마을대학> 이야기는 내일 아침으로 미룬다.

비 맞는 전문가/최정례

십여 년 동안 그가 한 일은
비 맞는 일뿐이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그는 재빨리 나가야 한다
버스 정거장 가로수 아래로
머리에 코에 수염에 빗줄기가
주르륵 흐르도록 해야 한다
주머니 가득 빗물을 채우고
그를 기다렸던 버스가 텅 빈 채
다시 출발할 때까지
서서 비를 맞아야 한다
건너편 창에서
그녀의 그림자 사라질 때까지
과자처럼 바삭거리며
리모콘과 뒹구는 그녀를 위해
가로수 늘어진 가지를 흘러
머리카락 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셀 수 있어야 한다
담배는 주머니 안에서 죽이 돼야 한다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지
비 맞는 장면을 보여 줘야 한다
죽을 때까지 지독하게 젖는 일을
불편없이 사랑해야 한다
전근대적 추억을 고용하려고
희생적 지출을 한 그녀을 위해
그는 비 맞는 전문가니까

#인문운동가박한표 #대전문화연대 #사진하나시하나 #최정례 #와인비스트로뱅샾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