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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걸리버 여행기> (2)

1549.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2월 25일)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이사장 최진석) < 읽고 건너가기> 나는 따라 오고 있다. 다음 달부터는 우리마을 10대학이 주관하여 많은 이들과 함께 선정된 책을 읽고, 책을 -라이팅하고, 최진석과 고명환이 하는 책수다에 참여할 생각이다. 어제 저녁에 2월의 책인 <이솝우화> 토크가 있었다. 유튜브로 실시간 중계를 했고, 그걸 유튜브를 통해 다시 들을 있다. 이번에 8 째이다. 다음 3월은 어떤 책이 선정될 궁금하다. 이젠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고, 5 이상 집합금지가 풀리면, 우리마을10대학을 중심으로 선정된 3월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 , 함평에 있는 최진석 교수의 <호접몽가>에도 가볼 생각이다. 마침 그곳 소고기가 일품이라니, 기행도 함께 생각이다.

 

지난 달은 <걸리버 여행기> 였다. 책에서 걸리버의 운명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저자인 조너선 스위프트의 운명인 것이다. 소위 이런 고전을 쓰려면, 다음과 같이 가지가 요구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여행을 통해 새로운 곳으로 건너 가려는 끈질긴 욕구와 기질 (2) 축적된 엄청나고 다양한 지식의 두께 (3)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사랑과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견된 문제 의식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고 싶은 사명감. 3박자가 갖추어 져야 한다고 나는 보았다. 최진석 교수도 고명환과 함께 했던 < 토크>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 <이솜우화> 대한 토크에서 들은 말이다. 여행하는 자와 이야기 하는 자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건너가기를 꿈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지난 2 23일에 이어, <걸리버 여행기>에서의 여행과 독서의 관계를 오늘 아침 하려 한다. 마침 <걸리버 여행기> 다시 읽는 것과 같은 최진석 교수의 독후감을 다시 읽어 가며 글을 생각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의 정의는 알베르 까뮈가 말한 "정신의 소독"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소독보다는 방역이 닿는다. 최진석 교수는 "여행의 형태가 독서라" 했다. 오늘 아침 시에서 처럼, 책을 읽으며, '여기서 행복할 " 줄임 말이 "여행" 아닐까? 여행의 정의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 동네에는 '여행'이란 카페가 있는데, 그곳의 정의 "여우로운 행복" 줄인 것이란다. 건조하다. 나는 '여기서 행복' 줄인 여행이라는 정의가 좋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 자신이 대단한 여행자였지만, 걸리버를 만나는 우리도 여행과 책읽기를 동시에 하게 된다.

 

최진석 교수에 따르면, "여행과 독서는 똑같이 나를 생경한 다른 환경으로 몰아넣고서 흔들리게 다음, 결국 나를 만나게 한다" 했다. 살면서, 중요한 것이 나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만난 자가 '자유로운 ' 한다.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자유롭다. 걸리버는 소설 속에서 말한다. 자유롭지 않을 "후손을 남기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 떠나고 떠난다. 자유로운 자신을 만나지 않으면 인생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본다. 걸리버의 가장 장점은 매번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편안한 집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심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사실 살아있는 자는 멈추지 않아야 한다. 걸리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낯선 나라를 보고 싶은 줄기찬 욕망 때문에 이상 체류할 없었다. 걸리버는 지난 여행에서 "겪은 불운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목마름" 항상 들떠 있었다.

 

여행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출발지와 목적지가 있는 ‘가짜’ 여행과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않는 ‘진짜’ 여행. 후자는 여행 도중에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다. 출발지와 목적지의 노예가 아니라, 매번 목적지와 출발지를 만드는 주인공으로 여행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여행이다. 한번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제대로 살려면, 우리는 과거와 미래,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아침 시처럼, 모든 요일이 여행이어야 한다.

 

 

모든 요일의 여행/김민철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는 말을 써 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 의 줄임 말이

‘여행’ 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걸리버 여행> 소설 이야기로 돌아 온다. 최진석 교수는 "여행은 강력한 지적 탐험이"라고 했다. 어딘가로 떠나서 자신을 낯설게 하려는 인위적 활동은 그것 자체가 편안히 쉬고 싶은 감각과 출발 직전의 불안을 극복한 매우 지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소설 속의 걸리버에게는 이런 소양이 있었고, 이런 소양을 키우고 지킬 있는 진실성과 성실성이 있었다. 그러니까 걸리버는 여행자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걸리버는 "여가 시간이면 고대와 현대의 최고로 뛰어난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걸리버는 어디를 여행을 하든 나라의 언어나 풍습이나 기질에 관심을 두었다. 시간과 공간을 막무가내로 소비하지 않았다.

 

반대로 건너가기를 멈추고, 자리에 있는 자는 여행을 가지 않거나 책을 읽지 않는다. 한자리에 멈춰선 진영에 갇혀 굳건한 '우리' 만든 다음 끼리끼리 공유하는 믿음에 기대 뿐이다. 생각은 멈추고, 적대감은 커진다. 갈라진 진영의 상대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경멸을 표시"하는 외에 일이 없다. 이런 사람들을 나는 주변에서 많아 본다. 우리의 현실이다.

 

건너가려는 호기심은 지적으로 수련하여야 나온다. 수련은 다음으로 나아가려는 자세로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지적 활동이다. 지적 활동이 결여되면, 자신의 하는 일을 지적으로 대하지 않고, 감정이나 감각으로만 대한다. 지적으로 수련 되지 않으면, 기능이나 기술의 단계에 머물지, 과학이나 철학이나 인문의 높이로는 상승할 없다. 그러면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태곳적부터 인쇄술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도서관은 별로 크지 " 있다. 도서관 없는 인쇄술처럼, 생각 없이 사는 삶이 된다. 그러다 보면, "근거 없는" 투쟁에 시간과 힘을 쓰고, 정작 나은 사회,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추상과 초월의 관념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다.

 

지적 수련으로 단련된 호기심으로 채워져 있어야 여행이나 독서를 통한 건너 가기를 있다. 걸리버 같은 진실성과 성실성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호기심을 토대로 해서 점점 지적으로 단련하여야 한다. 최교수는 이를 "양심"이라 표현한다. 나는 안에 있는 ' "라고 본다. 어쨌든 <걸리버 여행기> 소설을 보면, 지적 활동이 결여된 양심은 "선량하지만 불필요한 "으로 전락하여 "통치 기술을 아주 비좁은 범위로 제한"한다. 정치를 잃고 '정치 공작'으로만 사는 것이다. 최교수의 주장이다. 나도 동의한다.

 

"이런 결점은 무지로부터 생겨난다."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다. 주변에 보면, 예술을 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기능으로만 접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무지한 사회는 "정치를 학문으로 만들어 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지적으로 대하지 않고, 감정이나 감각으로만 대한다는 뜻이다. 이러면 "기계 기술의 향상에만" 관심을 두지, 그보다 차원 높은 "관념이라든지, 존재, 추상 초월 같은 개념은 아무리 해도 그들의 머리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최교수는 "양심이 지적으로 정련되지 않으면, 기능이나 기술의 단계에 머물지, 과학이나 철학의 높이로는 상승할 없다" 강조하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최교수의 말에 따르면, "양심이 깨어 있는 자만 여행할 있다." 그러면 호기심에 바탕을 양심을 굳지 않게 하려면 항상 긴장할 있어야 한다. 최교수는 "긴장은 몸과 마음으로 금방 죽는다는 사실을 채득해야 유지할 있다" 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그것도 세월이 흐르는 것을 보면, 금방 죽는다. "죽음을 자기 자신의 일로 인식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퍼져버린다." 소설 속에서 걸리버는 죽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를 여행한다. 거기서 소설가는 "절대 죽지 않는다는 끔찍한 전망" 많은 결점을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은 "독선적이고 역정을 내고, 탐욕스럽고, 심술궂고, 자만심이 상하고, 수다스러울 뿐만 아니라 남들과 친분을 쌓지도 못하고, 모든 자연적인 애정에 무관심"하다. 무엇보다도 어떤 일에나 "전혀 호기심을 보이지 않고, 질문하지도 않는다." 건너 가기는 전혀 불가능해 진다. "죽지 않는 그들이 나라를 그들의 손아귀에 거머쥐고, 국가 권력을 독점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욕심만 많았지 관리능력은 거의 없으므로 필경에는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 것이다." 최교수는 "양심이 굳어 여행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 정도로 위험하다" 말했다.

 

호기심으로 채워진 양심을 깨워 여행을 다니면, 깨달음에 이르러 "자연의 완성" 소설의 4부에 나오는 '말의 나라' "흐이늠" 만나게 된다. 걸리버는 "타락한 인간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훌륭한 네발 동물의 많은 미덕으로 인해 진정한 지혜에 눈을 떴다." 그러나 걸리버는 거기서 또한 머무르지 않았다. "진정한 지혜" "고향으로 헤엄쳐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말은 건너가기를 멈추지 마라는 뜻이다. 여행을 떠나는 것은 존재의 운명이다. 여기서 고향은 단지 "단순히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오랜 시간 전의 동네" 아니다. 故자는 '연고', '근거', '원래'이고, '본래' 의미한다. '까닭'이자 '연유'. 그러니까 고향은 나의 본래 모습, '원래의 ' 있었던 곳이다. 여행은 반드시 자신의 고행으로 되돌아 옴이다.

 

정말 <걸리버 여행기> 대한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언젠가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다시 읽고 _라이팅 하고 싶다. 조지 오웰이 "세상에 여섯 권의 책만 남긴다면, 중의 하나로 책을 고를 것이다" 말이 쉽게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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