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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신을 두려워 하지 마라.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기
(2022년 2월 23일)

어제 우리는 노자 <<도덕경>> 제 5장의 "天地不仁(천지불인) 以萬物爲芻狗(이만물위추구): 하늘과 땅은 무심하다.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는 문장과 "聖人不仁(성인불인) 以百姓爲芻狗(이백성위추구): 성인도 무심하다. 백성들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긴다"는 이야기를 다 마치지 못했다. 우리는 "천지불인"을 천지의 운행이나 활동, 그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감이나 바램과 무관하게 그 나름대로의 생성법칙과 조화에 따라 이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좀 야속하고 때로는 무자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성인들로 대표되는 도(道)를 인간적 감정에 좌우되어 누구에게는 햇빛을 더 주고, 누구에게는 덜 주는 따위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조화로운 음과 양의 원리와 상호 관계에 따라 순리대로 되어갈 뿐이다. 그냥 한 문장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세상을 이해하는 답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우주에는 하나의 로고스(原理)가 있는데, 그게 조화롭다. 그런데 고지식하게 그 원리에 따라 우주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있다. 나는 이 '관계론'에 주목한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관계적' 태도로 하루를 사는가에 따라 일이 순리(順理)대로 가느냐 아니면 그 반대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천하불인"을 '하늘과 땅은 인간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로 읽고, 이를 '신은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에피쿠로스가 말한 불행의 원인, 일상의 쾌락이 아닌 불쾌함의 원인인 두려움과 허영 그리고 무절제한 욕망이란 병을 고치기 위한  네가지 치료법 중 하나인 "신을 두려워 하지 마라"를 소환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순간의 삶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라고 말한다. 그의 이름을 따서, 영어로 '에피큐리언(epicurean)'이라 하면,  '쾌락(향락)주의자'라고 말한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한 쾌락은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특히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쾌락(동적 쾌락)을 추구했던 퀴레네 학파와는 달리, 그는 지속적이고 정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아타락시아'란 바로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극적 쾌락주의'라고도 한다. 이 말은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무제한의 쾌락이 아니라, 불안과 고통을 줄여 나가는 절제된 쾌락주의자라는 말이다. 그는 행복과 쾌락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쾌락만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며, 바람직한 삶은 고통(불쾌함)을 멀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라고 본다. 그의 쾌락주의는 방탕함에 빠진 자포자기의 삶이나 식욕, 성욕의 충족과 같은 강력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감각적 쾌락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에피쿠로스는 불행의 원인, 일상의 쾌락이 아닌 불쾌함의 원인인 두려움과 허영 그리고 무절제한 욕망이란 병을 고치기 위한  네가지 치료법을 이렇게 말하였다.
▪ 신을 두려워 하지 마라
▪ 죽음을 걱정하지 마라
▪ 선한 것은 얻기 쉬운 것이다.
▪ 최악의 상황은 견딜 만하다.

우리는 오늘 아침 이 네 가지 치료법 중 첫 번째인 "신을 두려워 하지 마라'와 노자가 말한 "천지불인"을 연결시켜 본다. 에피쿠로스는 친구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신들이 있다. 그러나 신들에 관한 많은 말들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잘못한 가정들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는 신이 없다는 무신론 이야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신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이다. 신이 우리를 심판하는 자로 무서워하기 보다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는 자비로운 신으로 받아들이자는 말로 이해하자는 거다.

그런데, 에피쿠로스 추종자들은 고대사회 최초의 무신론자로 불렸다. 그들은 세상이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원자와 사물을 허공에서 돌아다닌다. 세상에 신들을 위한 공간은 없다. 신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 생각은 당시 아테네인들에게는 파격적이었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상적인 삶은 허상으로 만든 신에 대한 제거에서 시작한다.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에 신들을 위한 공간은 없다. 에피쿠로스에게 있어서 삶의 철학은 경험에 근거한다. 신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인간의 삶에 개입 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신을 향한 기도를 이렇게 하였다고 한다. "만일 신이 인간의 기도를 들어준다면 모든 인간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을 이용하는 인간의 욕망을 꾸짖었다.

우리는 여기서 신과 종교 그리고 교회의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사람들은 종교를 '신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자신의 삶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그러니까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예수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예수는 자신을 따라 다니던 유대인들에게 삶에 대한 성찰과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종교가 폭력의 진앙이 된 것은 근본주의 탓이다. "자기가 믿는 것만 옳다고 믿는 건 오만이자 무식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신의 가르침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해듯이 삶에 대한 경외가 신이다." 신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경외하는 것이다. 공경하면서 두려워 하는 것이다. "IS와 알카에다는 종교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다. 종교는 오히려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 자기 삶을 깊이 보려는 의지이다. 나를 변혁시키려는 하나의 활력소이다." 그래서 종교의 가치는 유효하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대통령 선거를 코 앞에 두고 있다.  한 유력 대통령 후보 주위에 점성술과 미신이 난무하고 있다. 후보는 손바닥에 왕(王)자를 그리고, 후보 반려자는 “내가 무당보다 점을 더 잘 본다”고 자랑질이다. 천공스님, 건진법사, 무정스님 등 부처님의 가르침과 1도 상관없어 보이는 무당 부류들이 후보 주위에 끊임없이 얼씬거린다. 선거 유세장도 무당들의 굿판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 인문 운동가로 나는 별로 할 일이 없다. 잘 읽지 않는 긴 글만 아침마다 쓰고 있다. 오늘 아침 시가 '나'다.

서시/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 여기서 멈춘다. 나머지 이어지는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치료법'이 궁금하시면, 나의 블로그로 따라 오시기 바란다.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pakhanpyo.blogspot.com 이다. 최근에는 우리마을대학 홈페이지 블로그에도 글을 올린다. https://www.wmcss.net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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