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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주역의 괘는 일종의 프레임(frame)이다.

2634.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19일)

<<주역>> 행운이 뒤집혀 불운이 되고, 불운이 뒤집혀 행운이 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라고 본다. 이를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한다. 어떤 상황이 극점에 이르면 그와 반대되는 상황으로 변한다는 말이다. 작은 행운을 얻으면 우리는 누구나 기뻐한다. 좋은 일이 이어져 큰 행복이 되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여겨 점점 마음이 풀리고 교만 해진다. 이렇게 해이해지고 교만해진 마음이 바로 불운의 씨앗이 되는 거다. 이 불운의 씨앗이 자라 결국 그 사람을 거꾸러뜨린다. 반면, 불운에 빠진 사람은 누구나 정신이 번쩍 든다. 그리고 그 불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다. 이 정신차림과 각고의 노력이 바로 행운을 쟁취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의 이면에 숨어 있는 피땀과 분투는 보지 않고, 그의 행운만 부러워한다. '착실한 보폭'이 결여된 경지란 항상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다. 마치 절제된 행동과 학교 졸업 그리고 생계에 대한 책임을 배우지 않고, 꿈을 꾸는 것과 같다. '착실한 보폭'만이 일관성과 지속성을 보장한다.  어떤 경지도 일관성과 지속성이 결여된 것은 운이 좋은 것에 불과하다. 품질이 들쭉날쭉 할 수밖에 없다. 

순자가 말한 "적토성산(積土成山)"("권학편")이라는 말이 곧바로 머리에 떠오른다. "흙을 쌓아 산을 이루면, 거기에 바람과 비가 일어나고/물을 쌓아 연못을 이루면, 거기에 물고기들이 생겨나고/산을 쌓고 덕을 이루면, 신명이 저절로 얻어져서 성인의 마음이 거기에 갖춰진다."  도가 철학을 좀 아는 사람들은 '무위(無爲)'를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슨 일이건 그냥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으로 이해하고는 '착실한 보폭'을 하수의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그건 지적인 게으름일 뿐이다. 어떤 개성도 '착실한 보폭'을 걸은 다음의 것이 아니면 허망하다. 허망하면 설득력이 없고, 높은 차원에서 매력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많은 일을 그냥 '감(感)'에 맡겨 해버린다. '착실한 보폭'이 없는 높은 경지란 없다. 꿈을 꾸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꿈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역>>은 우리들의 삶을 다음과 같은 도식 안에 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객관적 현실에 대한 냉엄한 통찰이다.


작은 행복 → 큰행복(해이, 교만) →작은 불운 → 큰 불행(각성, 노력)


주역점은 이 도식을 원리로 삼고 있다. <<주역>>은 세상의 모든 것을 음(그늘)과 양(볕)으로 나눈다. 그런데 음과 양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는 운동의 과정 속에 있다. 이 음과 양의 운동 또한 "물극필반"의 법칙을 따른다. 음이 발전하면, 그 힘이 점점 강해진다. 그러다 극한에 이르면 음이 마침내 양으로 변한다. 양도 마찬가지이다. 주역점을 칠 때, 음은 소음(少陰)과 노음(老陰)으로 나뉘고, 양은 소양(少陽)과 노양(老陽)으로 나뉜다. 소음은 강해지면 노음이 된다. 그러나 소음도 변하지만 음이라는 테두리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노음은 다른다. 이것은 이미 극한까지 와 있는 음이다. 음 안에서는 더 갈 곳이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한 번 변하면 음에서 양으로 바뀐다. 음에서 막 양으로 바뀌면 소양이 된다. 소양은 성장해 노양으로 변한다. 변하기 변하지만, 아직 양이라는 테두리는 넘어서지 않는다. 그런데 노양은 양의 극한까지 온 것이기 때문에 한번 변하면 양에서 음으로 바뀐다. 그래서 소음이 된다.

소음과 소양은 변화의 과정 안에 있기 하지만 아직 음 또는 양이라는 각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즉 이 변화는 '양적 변화'로서 성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주역점에서는 이를 변하지 않는 효라는 뜻에서 "불변효(不變爻)"라고 부른다. 반면, 노음과 노양은 자기 떼두리를 넘어서 변한다. 이 변화는 '질적 변화'로 주역점에서는 "변효(變爻)"라 부른다.

잘 모르지만, 주역점을 치면 산가지를 셈해서 6, 7, 8, 9라는 네 숫자 중 하나를 얻는다. 그 과정은 다른 날 글로 잘 서술해 봉 생각이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서 6과 8은 음이고, 7과 9는 양이다. 음은 뒤러 물러나기 때문에 8이 소음(少陰, 불변효)이고, 그보다 더 물러난 숫자인 6이 노음(老陰, 變변효)이다. 여기가 헷갈린다. 양은 앞으로 전진하기 때문에 7이 소양이고, 그보다 더 앞으로 나간 9가 노양이다. 순서를 말하면, 9(노음, 변효) → 8(소음, 불변효) → 6(소음, 변효) → 7(소양, 불변효) → 9(노음, 변효). 이렇게 순환한다. 다음과 같은 숫자를 얻었다고 하면 무슨 괘일까? 8-8-8-8-7-7

8은 음이고, 7은 양이므로 이 괘는 아래 네 개의 효가 음이고, 위의 두개의 효가 양인 <관괘>가 된다. 그러나 이 경우는 음인 8과 양인 7이 모두 불변효이므로 다음의 <관괘>의 괘사가 점을 쳐서 얻은 결과이다.


그런데 산가지를 셈해 다음과 같은 숫자를 얻었다면, 다른다. '8-8-6-8-9-9'. 그러면 아래의 4 효(6과 8)는 음이고, 위의 두 효(9)는 양이다. 이 괘도 <관괘>이지만, 7과 9과 변효이기 때문에 음인 7이 양으로, 양인 9가 음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15번 <겸괘>가 된다.


주역점에서 어떤 괘를 얻었을 때 그 때는 모두 64 가지의 변화 가능성을 지닌다. 예컨대, <관괘>를 보면, 6개가 모두 불변효라면 이 괘는 <관괘> 그대로 있지만, 몇 개의 효, 몇 번째의 효가 변효냐에 따라서 <관괘>는 나머지 63개의 괘 가운데 어떤 것으로도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주역점을 쳐서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모두 64ⅹ64=4,096개이다.

다시 한 번 다른 사례를 가지고 점을 본다. 예컨대, '9-7-6-6-7-8'이라면, 아래에서부터 효를 그리면 다음 괘가 나온다.


그런데 밑에서 첫 번째가 9, 두 번째가 7, 다섯 번째가 7로 양효이고, 세 번째가 6, 네 번째가 6, 여섯 번째가 8로 음효이다. 그런데 첫 번째 9와 세 번째, 네 번째가 6으로 변효이다. 위의 괘는 하괘가 연못(澤)이고, 상괘가 물(水)인 <절괘>이다. 연못 위에 물이 있으므로 이 괘는 연못 안에 물이 있는 상이다. 물은 연못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면 안 된다. 이 괘는 세상사에 일정한 한계와 제약이 있음을 말해주는 괘이다. 그래서 이 괘의 이름은 '절제'이다.

예시를 든 점괘는 초구, 육3, 육사가 변효이다. 그러니 이 세 개의 효사를 본다.

初九는 不出戶庭이면 无咎리라.
초구    불출호정       무구
초구는 호정(집안 뜰)을 나서지 않으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戶:지게 호·외짝문 호   庭:뜰 정

六三은 不節若이면 則嗟若하리니 无咎니라.
육삼    부절약       즉차약         무구
육삼은 절제하지 못하여 뉘우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嗟:탄식할 차

六四는 安節이니 亨하니라.
육사    안절       형
육사는 편안한 시절이니 형통하다.

초구를 보면,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에서 사업을 계속한다면 크게 실패하지 않을 것으로 해석하고, 육3과 육사를 보면 절제가 더욱 필요함을 말한다. 육3은 지금이라도 절제가 부족했음을 뉘우쳐야 허물이 없을 것이고, 육4는 절제를 잘 받아들여 편안하게 여긴다면 잘 풀려갈 것으로 보면 된다. 자신이 원하는 바가 지금 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단단한 각오로 더욱 절제된 생활을 해야 한다. 그래야 순조롭게 지금 하는 일의 업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다 아니다. 초구, 육3, 육4가 변효이기 때문에 이 세 개가 변했을 때, 다음과 같이 <대과괘>가 된다.


본래 나온 <절괘>를 '본괘(本卦)'라 하고, 변효가 변하여 이루어진 괘를 '지괘(之卦)'라고 한다. 여기서는 <대과괘>가 '지괘'이다.  그러니 본괘인 <절괘>의 세 변효가 말해주는 상황에서 궁극적으로 <대과괘>로 변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대과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大過는 棟이 橈니 利有攸往하야 亨하니라.
대과    동    요   이유유왕       형
대과(大過)는 마룻대(대들보)가 흔들리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로워서 형통하다. (대들보가 휘어지니, 행동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며, 형통할 것이다.)

'대들보가 휜다'는 말은 집안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닥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행동하는 것이 이롭다'고 한 것은 그런 어려운 일이 닥치기 전에 변화를 도모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형통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지그까지 이야기 한 주역점을 종합하면, '절제'라는 틀을 통해 자기가 하는 일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익숙한 환경에서 자신의 일을 이어간다면, 크게 실패는 하지 않겠지만 지금 하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절제가 필요한 것이다. 절제가 부족했다면 그것을 철저히 반성하고 절제의 필요성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거다. 곧 집안에 견디기 어려운 일이 닥칠 수 있다. 대들보가 휘어질 정도일 수도 있다. 그에 대비해 미리미리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그러면 형통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역>>의 괘는 일종의 프레임(frame)'이다. 그 프레임을 통해 사유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서 멈추고, 내일 다른 괘를 가지고, 프레임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늘 아침은 우연히 <시인들이 뽑은 시 50>를 소개한 블로그를 만났다. 그래 당분간 그 안에 들어있지만, 한 번도 공유하지 않았던 시들을 하나씩 찾아 함께 읽을 생각이다. 오늘은 이재무 시인의 <제부도>이다. 이 시를 읽으니 '주역의 마음'인 "물극필반"이 느껴진다. 오늘 아침 사진은 하늘에서 "제부도"를 본 것이다. 오늘부터는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을 시 앞에다 배치한다.

제부도/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 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 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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