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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나는 '놀기 좋아' 하는 '쿨'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4년 전 오늘 아침 글입니다.

인문 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페이스북의 <과거의 오늘>이라는 항목을 보면, 몇 년 전에 포스팅한 내 글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어제는 잠시 나의 정체성을 잃고, 약간 길을 이탈할 뻔 했던 날이다. 그거 참 한 순간이다. 그러나 다행히 제 자리로 되 돌아왔다. 기분은 좋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4년 전 오늘 아침에 썼던 글을 읽으며, 회복했다.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나는 '놀기 좋아' 하는 '쿨'한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 그러면서 백수처럼 살고 싶다.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은 동양철학에서는 무의미하다고 가르친다. 굳이 뭐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그러려면, 상처 없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자립적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모델은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다음과 같이 6가지 측면에서.

(1) 나는 그처럼 어떤 이념도 이상도 믿지 않는다. 조국, 신, 혁명 따위는 한갓 망상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얽어 매고, 노예 화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조르바가 이런 원리를 깨달은 것은 학교나 책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현장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이성이란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이고, 결혼이란 "개골창에 대가리를 집어 넣은 것"이며, "하느님과 악마는 하나이다" 등과 같다.
(2) 나는 그처럼 천하를 떠돌지만 묵을 곳을 걱정하지 않는다.
(3) 조르바의 사랑은 진짜이다. 그걸 나는 배우고 싶다. 예컨대, 조르바의 손길이 닿으면 과부의 쭈글쭈글한 주름이 펴지면서 생의 가장 빛나던 시절로 돌아간다.
(4)  조르바는 모든 사물에서 영혼을 발견하는 범신론 자이다. 나도 그처럼 영혼이 떨리는 삶을 살고 싶다. "어린아이처럼 그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육체가 느끼는 것이다.
(5) 조르바가 보기에 세상은 카오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정교한 이념도, 완결된 이상도 이 카오스의 무상한 흐름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가 보기에, 두목(조르바의 주인)은 삶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서 이리 재고, 저리 재고, 또 이런 이상, 저런 정열에 사로잡힌다.  마치 이념과 가치를 잘 구축하기만 하면 세상만사가 다 해결될 듯이 말이다. 그런 것은 언제나 "뒷북"이고, "미네르바의 부엉이"이고, "뻘 짓"이다. 그러니 조르바처럼 카오스의 무상성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그 리듬을 타는 것 말곤 달리 길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6) 머리에서 나오는 추상과 관념이 아니라, 오장육부로부터 솟구치는 기 혹은 에너지의 유동적 흐름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명상 호흡이 중요하다. 단전 호흡을 통해 기운을 모으는 실력이 필요하다. 육체, 몸을 써서 힘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장자가 말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고,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하는 "거피취차(去彼取此, 저 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의 삶이기도 하다.

노자가 바라는 인간은 저 높고 먼 곳에 설정되어 있는 이상적 체제나 기준을 갈망하지 않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구체적이고 자연스런 일상에 더 충실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그런 사람은 정해진 어떤 특정한 맛이나 옷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먹고 있는 음식을 맛있어 하고 지금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예쁘다고 여긴다. 자신이 지금 처한 구체적인 곳에서 충실하지, 지금 이 곳의 구체성을 버리고 저 멀리 있는 이상을 향해 맹목적으로 내달리지 않는다.

장자는 이 카오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세상이 아무리 한심하고 구질구질하고 역겹고 난감하더라도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하면서 그 운명을 껴안고 한바탕 노는 능력을 터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 세상의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삶이라도 다시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절대자유의 삶이 아니겠는가 묻는다.

이념이나 가치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지금 우리사회도 이념이나 가치로 잘 무장되었다고 하는데, 혼용무도(混用無道, 다 뒤 섞여 혼란스러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떤 명분과 가치도 자연과 생명의 리듬을 따르는 것보다 더 위대할 수는 없다. 이것을 잊으면 외적 성취(겉치레, 허영)에 사로잡히고, 그러면 번잡 해져서 불안에 빠져 버린다. 그 순간 한편으로 두려워서, 무서워서, 되레 난폭 해지거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쾌락을 좇게 된다. 그리고 두려움과 쾌락에 빠진다면 제명에 죽기 어렵다. 자기 명도 지키지 못하면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쯤 되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 더 잘 이해된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두려움과 쾌락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자유의 경지이다. 이것은 수동적인 도피나 체념이 아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생명과 자연이 깨어날 때 비로소 가능한 세계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 산 것은 반드시 죽는다)했던 지난 1월과 2월이 거의 다 지나간다. 어제는 대동강 물도 녹는다는 우수(雨水)였다. 눈이 비가 되어 내리고, 얼음도 녹아 물이 된다는 우수였다. 이 우수의 비와 함께, 생명과 자연의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 싶다. 지난 일을 잊자. "새는 날아가면서/뒤돌아보는 법이 없다/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이미 죽은 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류시화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꺾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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