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9.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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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난 2월 6일에 이어, 김기현 교수의 <<인간 다움>>에서 '내면 세계라는 집을 짓는 기나긴 여정'이라는 제목으로 '중세(中世)' 시대를 풀이하는 곳을 읽고 공유한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시기는 중세 초기이다. 그러니까 기원 후 4세기부터 10세기까지의 시기이다. 이때 유럽은 온갖 전쟁으로 고통스럽고 가난한 혼란의 시기를 보낸다. 흔히 우리가 '암흑기'라고 부르는 기간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사후, 로마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게르만족이 유럽을 휩쓸며 로마까지 침공한다. 중앙 아시아에서 활약하던 유목민족인 훈족이 4세기 중엽 서쪽으로 이동해 유럽을 휩쓸며 침입하자 그들에게 밀린 게르만족이 대이동을 하면서 로마를 침공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이 겔만 족에 의해 멸망하면서 유럽 문명의 중심은 지중해 연안에서 유럽 내륙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지역에 걸쳐 있는 프랑크 왕국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9세기에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유럽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고 문화를 진흥한다. 또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교육 기관들을 육성하면서 안정되고 문화가 발전하는 시기를 맞는다. 그러나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성이나 정체성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혼란의 시기에 글로벌 종교가 된 기독교는 유럽 전역에 확대하면서 유럽 전체를 아우르게 된다. 한편 제도로서의 교회도 성장해간다. 세속의 세계는 각 지역의 풍속과 전통에 따라 나뉘어졌다. 반면 영적인 세계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그를 대변하는 교황 이하의 체계에 의해 통일성을 갖추는 모습으로 전개 된다.
10세기에 들어오면서, 중세는 중요한 변화를 맞는다. 기독교에 의해 싹이 심어졌던 평등 사상이 성숙하기 시작하고, 동시에 개인들의 내면 세계에 대한 관심도 점차 확대된 것이다. 한 사람의 내면 세계는 그 사람의 사적인 영역이다. 개인의 사적 영역이란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내밀한 영역을 일컫는다. 여기서 개인은 자신의 꿈을 꾸고 미래를 수상할 수 있다. 이 영역에 눈을 뜨는 것은 개인이 단지 공동체의 부품이 아니라, 독자적인 자율성을 가진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평등 사상 역시 존엄한 개인이 만들어지는 데 있어 중요한 조건이다. 계급과 신분에 따른 자연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는 존엄한 개인은 존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성의 사회구조상 유리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위해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의 기본권이 훼손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기획하고 성취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과 이러한 권리에 한해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중세를 거치며 성장해 간다. 이런 생각들이 성장하며 공고해지는 과정이 바로 개인이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다른 이들도 나처럼 자율적으로 삶을 꾸려 나갈 권리가 있으며 존중 받아야 한다는 '인간 다움'에 대한 생각을 형성하게 된다.
사실 10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는 유럽의 많은 지역을 영향권에 넣으며 교세를 확대해 갔다. 그에 따라 각 지역에 교회가 생겨났으며, 제도적으로도 그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문제는 제도화된 기독교가 기존의 세속 권력에 편입되면서 기독교 본래의 규범과 윤리가 점차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세속 권력과 결탁하며 성직 매매가 이루어졌고, 교회 재산을 사유화하고 자식들에게 상속하는 등의 세속화가 진행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내부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스스로를 정화하는 운동이 시작된다. 910년에 아키텐느(지금의 보르도 지역)의 제후 기욤이 사재를 들여 클뤼니 수도원(Abbay de Cluny)을 설립하면서 중대한 전환이 일어난다. 그리고 도처에 유사한 수도원들이 생겨났으며, 유럽 수도원 전체가 당시 기독교의 핵심 정신이었던 베네딕토 교단의 규율을 철저히 지킬 것을 요구했다. 청렴 운동이 사회 전체로 퍼진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다음과 같은 단호하고 혁명적인 조치를 취한다.
- 성직매매를 금지하고 사제 서품권을 교회에 귀속시킴으로써 교회에 대한 세속적 권력의 개입을 차단한다.
- 사제의 결혼을 금지함으로써 교회를 정화한다.
- 교회가 교황의 강력한 권한을 중심으로 통일적 모습을 갖추면서 교회 전체를 관장하는 교회법이 갖추어진다.
- 교회법학자들은 로마법을 참고해 교회법을 만드는데, 그 정신은 성경에 나타난 평등 의식을 근거로 삼는다. 이로써 기독교 초기에 씨앗으로 뿌려진 평등 의식이 교회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에 심어진 평등 사상이 중세 교회법의 제도화를 통해 확산되었다. 그리고 내면 세계에 대한 의식은 구원에 대한 생각의 변화로 확산된다. 우선 문학의 경향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그때 까지만 하더라도 문학은 영웅 중심의 대서사가 주를 이루다가, 기사들의 개인적인 행적과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것을 촉발한 것이 12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아서왕의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동체 적인 정신보다는 개인의 열정과 정서 그리고 그의 사적인 생활과 개인적 인연 등이 중요한 부분으로 나타났다. 서사에서 로망스로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에서도 나타난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정화 운동이 진행되면서 예수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아울러 구원에 대한 생각도 중요한 변화를 맞는다. 이전에는 구원을 위해 개인의 노력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호와가 사탄과 대적해 굴복시키는 대서사가 구원의 주를 이루고, 개인은 여호와를 받아들이는 신앙을 가짐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핵심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의 아들 예수는 만 왕의 왕으로서 인식되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 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시대로 접어들며,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생각도 변화한다. 구원은 예수의 고난에 개인이 동참해 예수를 닮아가는 개인의 노력을 동반한 성화 과정의 산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예수를 마음에 새기고 내적으로 변화해가는 개인적 연애시와 같은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러한 변화가 잘 보려면, 초기 기독교 수도원인 베네딕트 수도회의 규율과 11세기 안셀무스가 제시한 종교적 계율을 비교해 보면 된다.
6세기에 설립되어 전통을 대변하는 베네딕트 수도회는 청빈과 동정(동정), 복종을 맹세하고 수행과 노동에 종사했다. 모토가 '평화'와 ;기도하고 일하라'였다. 수도원 공동체의 가치와 규범을 담은 <<베네딕토 규칙>>의 내용이 "예수와 내 이웃을 사랑하라", "기도하라", "안정감을 취하라", "주변 사람들과 계속 대화함으로써 지나치게 혼자 있는 시간을 갖지 않도록 하라', '순종하라', '규율을 지켜라', '겸손 하라', '물건을 아껴 써라', '저의와 평화를 존중하라' 등이다. 보다시피 내면적인 변화보다는 행위와 관련된 규칙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11세기 안셀무스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종교적인 행위에서 찾지 않고, 내적인 성찰의 과정에서 찾는다. 그는 수도원의 공동으 삶과 규율에서부터 떨어져 나와 개인적 고독의 시간을 가는 것을 중시했다. 그는 구원을 위한 7단계를 제시하는 데, 자기 지식, 비탄, 고백, 죄의 수용, 심판에 순응, 벌의 고통, 벌의 사랑이 그것이다. 이 7단계는 행위가 아닌 내적인 성찰을 내용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후에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구성된 진행의 형식을 갖고 있다. 내적 성찰의 과정을 통해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가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클레보의 대주교 성 베르나두스 역시 내적인 성찰을 강조했다. 그는 시토(citeaux)회와 함께 새로운 의식을 일상 생활 인에게로 확대시킨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십자가 예수상도 변화한다. 예수가 사탄과의 전투에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왕자 같은 존재로 인식되던 시기에는 십자가 위의 예수는 왕관을 쓰고 눈을 부릅뜬 왕이나 투사처럼 묘사되었다. 그러나 내적 성찰이 학대되는 시기에 비로소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십자가 예수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너무 글이 길어지지만, 이 무렵 중요한 인물인 성 프란체스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안젤루스와 베르나두스가 수도회에 내에서 주장한 성화의 과정을 대중화시킨 인물이 프란치스코(프란체스코)이다. 프란체스코 교단의 중요한 가르침은 청빈한 모습으로 선교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주제했으며, 그들의 관을 동참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오늘은 시 대신에 성 프란치스코(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공유한다. 언제든지 기억하고, 실행할 생각이다.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 나를 도와 주소서.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다른 글들은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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