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7. 인문운동가의 사진 하나, 시 하나
(2021년 1월 14일)
동양 철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주역>에서 역(易)은 "낳고 낳는 것을 일러 말한다(生生之謂易)"이다. 그러니 인간은 이 '생생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 일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고미숙은 이를 "존재의 GPS"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먼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하늘은 텅 비어 있지만 변화무쌍하다. 그럼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낳고 또 낳을' 수 있다. 그것을 일러 하늘의 무늬, '천문(天文)'이라 한다. 그 다음, 몸을 굽혀 땅의 이치를 살펴야 한다. 땅은 조밀하고 구체적이며 견고하다. 그래서 만물을 두루 포용할 수 있다. 그것을 일러 지리(地理)라고 한다. 천문과 지리, 그 사이에서 인사(人事)가 결정된다. 천문과 지문 그리고 인사의 삼중주가 한 인간 존재가 만들어 내는 삼중주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이 인사(人事)를 하는 행위를 우리는 문화(文化)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문명(文明)이다. '경작(耕作)'하지 않고 문화에서 나오는 문명을 기대할 수 없다. 문화라는 단어의 어원이 잘 말해준다. 배철현 교수는 최근 자신의 <묵상>글에 다음과 같이 문화를 잘 정의했다. "‘문화’에 해당하는 영어단어 ‘컬쳐(culture)는 ‘땅을 개간하다, 돌보다’란 의미를 지닌 라틴어 동사 ‘콜레레(colere)의 과거 분사형인 ‘쿨투라(cultura)에서 파생되었다. 그 의미는 ‘관리된 것, 개간된 것’이란 의미다. ‘문화적인 인간’이란 자신을 관리한 사람, 자신의 마음을 갈아엎은 자다. 그(녀)는 그곳에 새로운 종자의 씨를 심고, 그 씨가 발아하고 자라나고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둥지를 틀고, 사람들이 그 나무가 자비롭게 주는 그늘에서 쉬도록 배려한다.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고, 자신의 심전(心田)을 갈아엎은 적이 없는 괴팍한 사람은 야만인(野蠻人)이다. 야만인은 자신의 욕심과 야망의 노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적이 없고, 제어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타인을 제어함으로 획득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에겐 무질서와 폭력이 법이다." 그 반대가 문명인이다. 나는 별도로 한 공간을 마련하여, 그 곳은 "세심실(洗心室)"라 이름을 짓고 마음의 밭을 갈고 있다.
<주역>의 관어천문 찰어지리(觀於天文, 察於地理)가 '생생의 이치'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할 때는 이 8자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 말을 줄이면 '관찰(觀察)'이다. 이 말은 천문을 보고, 지리를 살핀다는 말이다. 세상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일차적으로 관찰을 통해서 습득한다. 안다는 것은 이 관찰에 의해서 형성된 그 무엇이다. 관찰은 인간이 세상과 교류하는 통로이며, 세상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초석이다.
한문으로 관찰의 낱말 풀이를 해 본다. 관(觀)은 황새(雚)가 큰 눈을 뜨고 본다(見)이다. 또는 황새가 하늘에 날아 올라 세상을 크게 본다는 뜻으로 객관적인 세상을 크게 조망해 본다는 의미가 있다. 찰(察)은 집(宗)에서 제사(祭)를 올리며 신의 뜻을 알아낸다는 뜻으로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 사물과 상황의 진의를 파악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관'은 하늘을 보며 세상을 크게 조망하는 것이고, '찰'은 땅을 굽어 보며 세부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관찰은 큰 흐름의 줄기를 보고, 세부적인 일의 정황을 파악한다는 두 가지 방법이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다. 큰 흐름만 보고 세부적인 정황에 대한 살핌이 없으면 두루뭉술한 이야기가 될 것이고, 세부적인 정황만 살피고 큰 흐름을 보지 못하면 그 정황의 정확한 주소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관찰이라는 것은 단지 객관적인 세상을 보는 것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던져 놓고, 던져진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것도 관찰이다. 모든 현상과 존재를 관찰하는 데, 우선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그 다음 큰 흐름을 보고, 세부적인 정황을 살펴 본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한다. 나를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하는 그 무엇을 또한 관찰한다.
<주역> "계사전" 제 4장의 "우러러서는 천문을 보고(仰以觀於天文), 구부려서는 지리를 살핀다(부以찰어지리)"에서 "관어천문, 찰어지리"가 나온 것이다. 이는 하늘의 이치인 천문은 관(觀)하고, 땅의 이치인 지리(地理)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국면인 하늘의 이치는 관(觀)하고, 구체적인 땅의 이치는 찰(察)한다는 것이다. 관과 찰이 겸해질 때 세상의 이치를 제대로 알게 되는 셈이다. [<장자>의 덕충부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땅은 모든 것을 실어준다. 천무불복, 지무부재이다.]
서양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플라톤의 우주론을 인용해 본다. "우주에는 우리 삶을 이끄는 섭리(섭리-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providence)가 담겨 있고,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인간은 그 섭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플라톤에게 우주는 인간을 이루는 물질적 원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인간의 삶을 훌륭하게 이끄는 원인이다." 즉 그에게 "'자연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곧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풀어 줄 열쇠였다. 플라톤은 하늘 속에 담긴 땅의 모습을 보았고, 땅 위에 펼쳐진 하늘의 원리를 읽었다." (신근영, <삶을 노래하는 우주>, 채운 수정 기획 엮음 <고전톡톡>)
이 관찰이 앎의 시작이고 본질이다. 이 앎과 함께 인간의 길이 시작된다. 인생이란 길 위에서 '길' 찾기 이다. 그래 안다는 것은 구도(求道) 행위이고, 그런 사람은 다 구도자이다. 나도 구도자이다. 이러한 길을 찾을 때 필요한 것이 지도이다. 그러니까 앎이란 지도인 것이다. 앎이 없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정처없이 방황할 수 있다. 그래 무지가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무지는 그 자체로 고통이고 괴로움이다.
무지로 헤매다가, 길을 찾는 것을 우리는 '깨닫는다'고 한다. 지혜의 출발이다. 그 때 존재는 환희로 넘친다. 희열과 기쁨을 맛본다. 그래 사람들은 공부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만끽한다.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 눈 있는 자가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러 올리듯, 그 희열은 평온함으로, 평온함은 오롯한 집중력으로 변주되어 다시는 길을 잃지 않는다.
이런 공부를 고미숙은 '읽기와 쓰기'로 바꾸었다. 그래 그의 책 이름이 <읽고 쓴다는 것, 그 거룩함과 통쾌함에 대하여>이다. 천지의 운행을 주시하는 것이 읽기이고, 그 사이에서 삶의 비전을 여는 것이 쓰기이다. 그건 동시적이어야 한다. 난 그걸 몰랐다. 그냥 지난 3년 전부터 아침마다 쓰다 보니 내 삶의 평온이 변주되어 찾아 왔다. 하늘을 보는 것과 땅을 살피는 것이 동시적이어야 하 듯이, '읽기와 쓰기'는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산다는 것은 천지인의 삼중주를 아는 것이고, 그 앎의 구체적 행위는 바로 '읽기와 쓰기'이다.
코로나-19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책을 꼼꼼하게 일게 된다. 큰 소득이다. 오늘도 공부하고, 그 속에서 기쁨을 만끽한다. 오늘 아침 공유하는 시는 눈이 다 녹기 전에,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함께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문정희 시인의 "겨울 사랑"이다. 어제는 몇 일간의 강 추위 다음이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좀 포근했다. 사람은 참 변덕쟁이이다. 사진은 한밭수목원에 일부러 가 찍은 사진이다. 다행이 눈이 있었다.
겨울 사랑/문정희
눈송이 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 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혼탁한 언론과 입맛에 맞는 것들만 SNS에 올리는, 네이버나 다음의 담벼락 뉴스들 앞에서, 나는 혼란스럽다. 인공지능에 대체되지 않으려면, "인간 고유의 능력을 일깨우는 무기로 철학 하라"는 말이 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예전에 적어 두었던 다음 글이 생각났다.
사이먼 사이넥은 자신의 책,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에서 말한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무엇(What)'이 아니라, 가장 중심에 있는 '왜'이다. 그는 '왜' 일을 하는가?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 그럼 '무엇'을 하면 되는가? 이런 순서로 고민하라고 말한다. 다음 그림이 잘 정리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 이 일을 하게 되면 세상에 이런 일들이 펼쳐질 거야. '왜'의 질문이다. 그럼 어떻게 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어떻게'라는 질문이다. '이런 일을 하면 되겠다.' 마지막으로 '무엇'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왜'라는 질문을 하고, 그 이유를 잊지 말고, 즐겁게 일을 할 때 열정이 나온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생각나는 대로 살아간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다도 왜 해야 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왜(why)를 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왜(why)'를 묻고, 그 다음으로 '어떻게(How)', 그 다음으로는 '무엇(What)'을 물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 '왜'라는 질문은 이런 것 들이다.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어.' '이 일을 하게 되면 세상에 이런 일들이 펼쳐질 거야' 이다.
2) '어떻게"라는 질문은 '그럼 이 꿈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이다.
3) '무엇'에 대한 질문은 '이런 일을 하면 되겠다' 이다.
최진석 교수는 "한 사람의 삶은 전적으로 그 사람이 가진 시선의 높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까지만 살다 간다는 말이다.
문명은 시선의 높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질문에도 급이 있는 것이다.
- 가장 아래 층은 구체적인 물건들로 채워진다. What에 대한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 둘째 층은 구체와 추상 사이에 있는 제도들로 채워진다. How에 대한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 가장 높은 층은 추상적인 형태를 띠는 철학이나 윤리나 문화 같은 것으로 채워진다. Why로 질문이 이루어진다.
중간 층에 있는 제도는 인간이 사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물건들이 생산되고 삶이 영위된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은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길(=제도)에서 만들어 진다. 그러나 제도는 철학이나 문화적 지향에 의해 결정된다. 도는 길이다. 길을 한문으로 도(道)라면, 이 세상 최고 도는 우주, 아니 자연의 도이다.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이런 식의 길을 내고, 저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저런 식의 길을 낸다. 풍요롭고 정의로운 삶은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길(제도)에서 만들어진다. 자연에 가까운 길로 살고 싶은 것이 '낙도(樂道)'이다. 그 길을 즐기는 것을 나는 권한다. 제도도 여기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런 꿈을 꾸는 사람은 저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제도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사람의 생각(철학)이 길을 내고 또 그 길을 따라 물산(物産)의 질과 양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명은 사람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높은 생각은 높은 문명을 만들고, 낮은 생각은 낮은 문명을 만든다. 생각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계를 이해라고 관리하기 위해 만든 고효율 장치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도전하지 않는다. 그냥 도전보다는 누구 누구처럼 살려고 한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남이 정해준 정답을 찾으려는 것에만 집착한다. 이런 사람은 야성(野性)이 부족하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타인의 이론에 노예가 되어 지켜야 할 것을 많이 만들고, 선악의 기준을 중요시한다. 그럼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야성을 키우는 일이다. 마음 속의 야수를 키우는 것이다. 짐승처럼 덤비는 일이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여는 것이다. 그 생각하는 일에, 관찰하고, 그 다음 읽고 쓰기가 최고이다. 그 길이 우리가 아는 길이고, 알아야 생각의 높이가 높아진다. 그러면 나와 다른 이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선 또한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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